金容瓚
容瓚1903. 9. 6 ~ 1937. 4.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영동청년동맹
- · 서울청년회
- · 중앙청년동맹
- · 영동농민조합
- · 적우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광주학생운동
- · 영동농민조합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903년 9월 6일 아버지 김최수(金最洙)와 어머니 이범직(李範直)의 5남매 중 넷째로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영동면(永同面) 부용리(芙蓉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적(金迪)·김창길(金昌吉)을 사용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계산학원(稽山學院)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 영동청년회관에 출입하면서 영동지역 청년단체의 지도 인물인 장준(長埈)·김두수(金斗洙) 등과 교류하였으며, 청년단체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23일 영동청년회(永同靑年會)에서 주최한 ‘영동소년동화대회’에 연사로 참여하였고, 1929년 2월 14일 기존의 면 단위 청년회 조직체계를 개편해서 군 단일의 영동청년동맹(永同靑年同盟)을 조직하는 창립대회에서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1929년 봄에는 서울청년회에, 1930년 10월에는 중앙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장준 등 고향의 청년단체 인물과도 연락을 이어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서울에서는 12월 9일 대규모의 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신문 과정에서 자신이 조선공산청년회 야체이카 조장이라고 진술하고, 광주학생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야체이카원들과 논의하고 격문 살포에 관여하였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신문에서는 일체의 내용을 부인한 결과, 1930년 9월 14일 예심면소(豫審免訴) 결정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귀향 후 영동농민조합과 영동청년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영동소비조합(永同消費組合)의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영동소비조합은 영동농민조합 지도자들이 운동자금 획득과 운동 확대·강화를 목표로 조직한 단체로, 영동농민조합과 영동청년동맹 간부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1931년 3월에서 4월 사이 김태수(金台洙)·손순흥(孫順興)·김용각(金容珏)·이상용(李尙鏞) 등과 적우동맹(赤友同盟)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세계무산계급 해방운동의 전위로 자임하고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 포함된 3개 항의 강령을 정하고, 김태수를 책임비서로 선출하였다. 이때 이론연구를 담당하는 정치경제부 책임자로 내정되었다. 이후 일부 간부들이 영동농민조합을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1931년 4월 하순 장준·최판흥(崔判興)·이희수(李犧壽) 등과 「12월테제」·「9월테제」·「조선에 있어서 반제국주의 협동전선의 제문제」 등의 문건을 조합원의 이념 교양사업 교재로 사용키로 결정하였다. 또한 검거된 조합원과 소작쟁의·동맹파업 등에 대비한 비상준비자금을 마련키로 결정하고, 비상자금의 보관 책임을 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2년 2월 20일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深川面)의 금호농민야학이 개최한 학예회에서 ‘공산주의가 선전되었다’는 혐의로 일제 경찰의 검거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붙잡혔다. 1933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1934년 7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원심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 당심 미결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에 산입)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5일 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 1937년 4월 17일 사망하였고, 이후 유해는 2021년 3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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