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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득

金外得

1912. 8. 20 ~ 1993.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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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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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梁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양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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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양산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양산농민조합 정기대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2년 (음)8월 20일 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석산리(石山里)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라 김외덕(金外德)이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1929년 서울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호응하여 일어난 1930년 3월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퇴학당하고 양산으로 귀향하였다. 1931년 4월 4일 이귀운(李貴云)의 주도로 조직된 양산농민조합(梁山農民組合)에 가입하여, 소년부에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열린 제3회 정기대회에서 첫째 소작권 영구 확립, 둘째 지세 및 기타 공과금의 지주 부담, 셋째 소작료 4할 납부 등을 결의하였던 바, 일제 경찰이 이를 문제 삼아 3월 5일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간부들을 체포하여 구류 처분하였다. 이에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이들을 구출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32년 3월 16일 9시경 300여 명의 조합원이 남부동(南部洞)의 오성철(吳性哲), 북부동(北部洞)의 진경오(陳敬五), 중부동(中部洞)의 이임수(李任守) 집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장호와 함께 조합원들을 이끌고 양산경찰서(梁山警察署)를 포위한 다음, 구류되어 있는 조합원의 가족인 문수동(文守東), 최숙이(崔淑伊), 이복득(李福得) 등을 앞세워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였다. 양산경찰서 측이 석방 요구를 무시하자, 조합원들을 이끌고 양산경찰서 내부 진입을 시도하였고, 일제 경찰들이 이를 저지하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일제 경찰이 쏘는 ‘공포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합원들을 독려하면서 시위를 이끌었다. 조합원들의 기세에 압도당한 양산경찰서장은 실탄 발사를 명령하였고, 조합원 윤복이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피신 도중에 구류 중인 양산농민조합 간부들을 부산(釜山)으로 이송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양산농민조합 소년부원 50여 명과 습격단을 조직하여 이들을 구출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3월 17일 새벽 3시, 이들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으나, 경상남도 경찰부·부산경찰서·동래경찰서로부터 병력이 증파되어 70여 명에 달하는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소년부원들이 선두에 서서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후 양산을 떠나 김해(金海)·부산 등지로 피신하던 중, 1932년 4월 7일 경부선 물금역(勿禁驛)에서 붙잡혔다.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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