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完龍
完龍1918. 7. 1 ~ 2013. 8.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평양학병사건(平壤學兵事件)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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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8년 7월 1일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함흥 지역의 지주인 김보희(金普熙)이다.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 후 1944년 일본 경찰에 의해 강압적으로 학도지원병에 가게 되어 평양사단에 입영하게 되었다. 1943년 창설된 평양사단은 42보병부대, 43보병부대(함흥주둔), 44보병부대, 47포병부대, 48공병부대, 50치중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44년 1월 입영 후 제42보병부대에 배치되었다. 소수 인원으로 분산 배치된 학도병들은 서로 말도 걸지 못하고 훈련 때에나 만날 수 있는 감시 상황 속에서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또한 일본 출신 고참병들로부터 심한 민족적 차별과 멸시를 당하면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내선일체(內鮮一體)’ 라는 말의 허구성을 깨달아 갔다. 1944년 중순부터 일본의 연이은 패전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6월 한국 상공에 B-29가 출현하고 마리아나 해전을 비롯한 여러 전선에서 일본군이 패배를 거듭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평양사단에 입대한 학도병의 대부분이 이미 중국으로 파견되고 남은 학도병마저 곧 중국으로 파견될 예정이라는 상황이 맞물려 평양사단 내 학도병들 내에는 부대를 탈출하고자 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1944년 7월 제42보병부대 내 한국인 학도병들을 규합하여 삼천당(三千黨)을 결성할 것을 제의하여 동조를 얻고, 조직을 구성하였다. 강령은 첫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대항해 투항할 것, 둘째, 일본 군부를 내부로부터 교란하여 일본의 패망을 추진할 것, 셋째, 힘을 모아 무장 봉기하고 만일의 사태 때는 백두산(白頭山)으로 들어갈 것, 넷째 자치권과 참정권은 결코 고려치 않고 최종적 목표는 오로지 독립이라고 하여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이 결사는 곧 타 부대의 한국인 학도병에게도 알려져 44부대, 47부대, 48부대, 50부대 내 학도병들과 연계한 조직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부대를 탈출하여 한만(韓滿) 국경 지대와 부전고원(赴戰高原)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10월 1일 탈출을 결행하고자 계획하였다. 평양 학병 의거를 위해 최고지휘자를 맡아 지휘 체계는 최고지휘자로 그를, 참모장으로 박성화(朴性和), 작전참모 전상엽(田相燁), 보급참모 최홍희(崔泓熙), 정보참모 이도수(李道秀), 그 아래 제1지대-각분지대, 제2지대-각분지대로 조직체계를 구성하였다. 개별 탈출 동선과 규합, 식량과 무기의 확보, 게릴라전 계획, 국제 정세 등을 모두 염두에 둔 계획이었으나 평양사단이 함남 부전고원으로 대규모 기동훈련을 떠나게 되면서 거사일을 11월 1일로 미루게 되었다.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47부대의 노영준(盧永濬)은 도움을 받고자 추을헌병대의 보조 헌병 임영호(林永鎬)에게 이를 알리고 동지를 규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임영호는 이 계획을 헌병대 상부에 알리게 되고, 헌병대는 학병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출 도중 일본군 상등병과 시비가 붙어 헌병대에 연행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평양사단 학도병들이 대대적으로 헌병대에 잡혀가게 되고 곧 탈출 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헌병대에서 학도병들은 5개월에 걸쳐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1945년 6월 10일에는 조선군관구임시군법회의(朝鮮軍管區臨時軍法會議)가 평양사관구법정(平壤師管區法庭)에서 열리게 되면서 이들은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징역 9년을 받고 군적에서 박탈되어 민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정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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