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석
金玉錫1903. 5. 10 ~ 1962. 8.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장흥청년동맹
- · 전남운동협의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8)
관련 사건
- ·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8) 1903년 5월 10일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남면(南面, 현 (蓉山面)) 인암리(印巖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943년 9월 6일 김성균(金性鈞)으로 개명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0년대에 장흥에서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유재성(劉載星) 등과 함께 사회과학을 연구하였다. 1929년 4월경부터 장흥군 남상면(南上面)의 보통학교 훈도(訓導) 김종선(金鍾善)으로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에 공감하였다. 이후 그 해 7월경 유재성과 함께 대중을 중심으로 한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장흥청년동맹(長興靑年同盟)을 조직하고 간부가 되어 장흥지역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장흥청년동맹의 규약과 강령 등을 정하고 이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0년에는 정기대회나 임시대회, 위원회 등이 계속 일제 경찰에 금지를 당하여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다. 한편 1929년 8월 유재성·정진수(丁瑨壽) 등과 모인 자리에서 김종선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먼저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장흥의 농촌 마을에 야학을 설치하고 농촌의 무산 청소년을 대상으로 계몽 활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그 해 10월 인암리의 신곡서당(新谷書堂)에 신곡야학(新谷夜學)을 개설하고 2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문자를 가르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음)8월부터 10월 사이에는 김재현(金在賢) 등 20명의 학생들에게, “현재의 사회는 빈부 차이가 심하여 지주와 유산자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소작인과 무산자는 아무리 일해도 그 작물은 지주에게 탈취당하여 얻는 것도 없고 생활 의식(衣食)에 궁핍해하고 있으므로, 우리 소작인과 무산자는 일치단결하여 지주와 유산자에 대항하고 그들의 재산을 획득 분배함으로써 빈부의 차가 없는 평등한 사회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내용을 여러 차례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하던 중 1932년 12월 4일 일제 경찰이 장흥청년동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했을 때 붙잡혔다. 1933년 2월 14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계속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1934년 2월부터 6개월 동안 전라남도경찰부 고등과의 지휘로 강진·해남·완도·장흥·영암·목포·보성·진도·순천·여수 등 9개 군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관련자 등 558명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던 이른바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470여 일 동안 구금되어 취조와 고문을 받다가 1935년 12월 21일 병세(病勢)가 악화되어 면소(免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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