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활
金永活1909 ~ 1935. 5. 1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청년동맹 경주지부
- · 신간회 경주지회
- · 경주적색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관련 사건
- · 경주적색농민조합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1909년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 당시 부고를 알린 『조선일보』 5월 17일 기사와 『동아일보』 5월 18일 기사에 요양을 위해 울산군(蔚山郡) 울산읍(蔚山邑) 달리(達里)로 내려왔고, 27세로 사망하였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1929년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중외일보(中外日報) 지국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6월 9일 오전 11시 천도교당(天道敎堂)에서 청년동맹경주지부(靑年同盟慶州支部) 설립대회가 개최되었을 당시 임시집행부 서기로 의장인 이중근(李重根)과 함께 제1회 집행위원을 선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이 회의에서 제1회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7월 21일 개최된 제3회 집행위원회에서는 이중근에게 위원장을 넘기고, 김정환(金正煥) 과 함께 서무재정부 임원으로 보직을 변경하였다. 1929년 9월 3일 중외일보 경주지국(慶州支局)에서 열린 신간회(新幹會) 경주지회(1928년 2월 7일 설립) 간사회에서 서기장과 서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경주지회에서 1930년 10월 신간회 본부의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할 경주지회 대표회원으로 김철(金喆)과 함께 선정되었다. 150명에 달하는 신간회 경주지회 회원 가운데 대표회원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중외일보 경주지국, 청년동맹 경주지부, 신간회 경주지회 등에서 언론활동과 청년운동, 신간회 활동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일제 경찰들의 감시 대상이 되어 여러 차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30년 2월 27일 경주군 감포읍(甘浦邑)의 감포주재소(甘浦駐在所)에서는 3월 1일에 3·1절을 기념하는 시위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예비 검속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 대상에 포함되어 구금당하였다. 이후 풀려났다가 또 다시 한번 구금되었고, 1930년 3월 3일 풀려나기도 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 경주지국장이었던 이칠성(李七星)의 주도로 경주적색농민조합(慶州赤色農民組合)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9월 24일 경주에서 거행된 제1회 신라제(新羅祭) 반대시위 사건으로 조직이 발각되었다. 이때 여기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경주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다가 병이 악화하여 보석으로 풀려났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주보생의원에 입원하였고, 1935년 5월 5일 퇴원하여 울산군 울산읍 달리에 있는 자택으로 내려가 요양하였다. 그러나 5월 12일 새벽, 옥고 중에 얻은 폐렴으로 인해 2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