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룡
金應龍1902 ~ 1919. 4.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울산군 하상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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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서리(西里, 현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호는 창암(蒼岩)이다. 1919년 4월 당시 하상면 병영리(兵營里) 사립 일신학교(日新學校) 출신 청년들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울산군 하상면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귀향한 청년들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달하자, 병영청년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거사를 도모하면서 계획되었다. 주도 인물들은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였으며 4월 3일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 500여 매를 제작하였다.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 청년회원들과 함께 일신학교 교정으로 모였다. 일신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여 오전 11시 축구시합으로 위장한 시축(始蹴)을 신호로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가 인근지역을 행진하자 동리 주민이 호응하면서 삽시간에 시위 군중이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울산의 일제 경찰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도인물을 붙잡았다. 이때 이문조(李文祚)·이종필(李鍾弼) 등과 함께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피신하였다. 이들은 그 날 4일 저녁에 모여 이튿날 다시 만세시위를 진행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4월 5일 오전, 이문조가 큰 깃발을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자 군중이 일신학교로 몰려들었다. 오후 3시를 기해 동료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며 전날 끌려간 주도 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 진압으로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고 주도 인물이 붙잡혔다. 이때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붙잡힌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이에 일제 군경이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고, 시위대 선두에 서 있던 문성초(文星超)·엄준(嚴俊)·주사문(周士文) 등 3명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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