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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允玉

允玉

1901. 1. 12 ~ 1944. 9. 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允玉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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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송화(松禾)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송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8)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8) 1901년 1월 12일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연정면(連井面) 조령리(里鳥嶺)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탑골공원에서는 학생 2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가두행진에 나섰다. 이때 이 대열에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일의 만세시위에 이어 3월 5일 아침에도 남대문 역 광장에서 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오전 9시 남대문 역 광장에 시위 군중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날 김종현(金宗鉉)으로부터 거사 계획을 전해 듣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 등과 함께 만세시위의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해갔다. 그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고 남대문 쪽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때 길 가던 사람들도 이 행렬에 뛰어들어 5,000여 명이던 시위 군중은 어느덧 10,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일단의 군중은 남대문 시장을 지나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을 거쳐 종로 보신각으로 향하였고, 다른 시위 행렬은 남대문에서 대한문을 거쳐 보신각에 이르러 합세하였다. 시위 행렬이 남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 중이던 일제 경찰이 저지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하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 50여 명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지만, 시위 행진은 계속되었고 보신각(普信閣)까지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더욱 증강된 일제 경찰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저지하자 시위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중상을 입고 75명이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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