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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潤德

潤德

1888. 11. 19 ~ 195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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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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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구(大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대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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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6)

관련 사건

  • · 대구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6) 1888년 11월 19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수성동(壽城洞, 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한약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3월 10일 대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대구의 만세시위는 남성동(南城洞)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이만집(李萬集)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만집은 2월 24일~25일경 서울의 이갑성(李甲城)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접하였고, 3월 2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에게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이후 이만집은 대구의 기독교계 유력 인사인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서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각자 지역 주민과 계성학교(啓聖學校),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대구성경학교 등 대구지역 학생들을 독려하여 거사 당일인 3월 8일 오후 3시 서문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3월 9일에는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유지들의 계획한 만세시위가 일제 군경의 검속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학생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지속하려고 하였다. 이때 다른 지방 유지들과 함께 학생들의 의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다음날인 3월 10일 남문외시장 장날을 기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장날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서둘렀다. 3월 10일 학생들은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장시에 전날 준비한 태극기를 운반하여 왔다. 마침내 거사 시각인 4시 30분경 수많은 군중이 운집하자 학생과 유지 등 거사 주도자들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라 대서특필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도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저지로 인해 시위 군중의 행진은 가로막혔고,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그 해 5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다시 받았다.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1일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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