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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의

金有義

1869. 1. 17 ~ 1947.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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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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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강화(江華)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강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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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강화군 강화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69년 1월 17일 경기 강화군(江華郡)에서 태어났다. 1919년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신문리(新門里)에 거주하며 국화리(菊花里) 감리교회 전도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강화의 본격적인 만세시위 계획은 기독교 북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9일 오후 3시 길직리(吉稷里) 교회에서 감리교 인사들의 회합으로 계획이 본격화되었다. 이 모임의 논의 결과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3월 18일 강화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5일 후인 1919년 3월 14일 장동원에게서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강화인민에게」, 「독립가」 등 4종의 문서를 전달받았다. 이를 마을 주민들에게 배부하고, 3월 17일 밤에는 신문리에서 강화면으로 가는 길인 부내면 국화리 길 위에 살포하였다. 3월 18일 결사대원인 유희철·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장동원·장명순(張明淳) 등이 앞장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시위대는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강화경찰서는 순사보 8명을 파견하였으나 진압이 불가능하였다. 군청 앞과 시장에 모인 인원이 2만 명에 달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가겠다. 군청을 파괴하겠다”라는 말에 강화군수조차 만세를 외쳤다. 군청 앞에서 독립연설회가 진행되고 오후 5시에는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된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제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유희철· 장상용·조기신(趙基信) 등을 석방하였다. 시위대는 그 날밤 8시 30분 일시 해산하였다가 재차 시장에 모여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오후 11시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19일 오전 8시부터 일제 경찰은 증파된 보병 대위 이하 40명의 군대와 더불어 시위 참가자들을 검거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하였던 63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재판이 긴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미결구류일수 180일을 본형에 산입(算入)하여 바로 출소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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