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金渭錫

渭錫

1898. 9. 16 ~ 1969. 1. 2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渭錫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해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9월 16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연평동(連坪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영해면 성내동(城內洞)에 거주하였다. 영해면 만세시위는 기독교 조직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준비되었다. 만세시위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북장로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그는 평양신학교로의 유학도 단념한 채 고향에 돌아와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2일 김세영은 낙평동 교회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런데 이튿날 김세영이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검거됨에 따라, 이후 만세시위는 권태원이 주도하게 되었다. 권태원은 3월 15일 병곡면 송천동의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만나 김세영의 계획을 전하고, 그의 찬동을 얻어냈다. 권태원과 정규하의 적극적인 세력 규합 노력 속에 권상호(勸相鎬)·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박희락(朴羲洛) 등이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송천동의 기독교인은 물론 권씨·남씨·박씨·이씨·백씨 등 영덕의 대표적 유림인 5대 성씨 일족을 규합해 나갈 수 있었다. 3월 18일 영해 장터에서는 오후 1시경 정규하·남여명·박희락·권영조(權永祚)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호응하여 김성욱(金聲旭)·조영한(趙榮漢)·김원발(金源發)·손영세(孫永世)·김치운(金致雲)·이상화(李祥和)·장성렬(張星烈)·김학이(金鶴伊)·김실광(金實光) 등이 군중 속에서 만세를 외치고 행진을 이끌었다. 평화적인 형태를 띠던 만세시위는 영해경찰관주재소 스즈키(鈴木鶴次郞) 주임순사가 시위대에 해산을 명령하면서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스즈키 주임순사 이하 순사와 순사보를 구타하고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시설에 대한 파괴가 이어졌다. 시위대 일부는 병곡면 병곡동(柄谷洞)으로 이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 시설을 파괴하였다. 3월 19일에도 영해의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오전 10시경 포항의 헌병대가 파견되었으나 시위대를 진압할 수 없었다. 오후 5시경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증파되었다. 일제 헌병과 보병은 합세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가하였고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임창목(林昌穆)·최재곤(崔在崑)·이해술(李海述)·이회동(李會東) 등 8명이 사망하고, 남효량(南孝樑)·김위환(金渭煥)·김도식(金道植)·남만진(南晩鎭) 등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우측 발목에 총탄을 맞았는데, 결국 발목을 절단하여 평생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