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원창

金源昌

1874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원창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황해 황주(黃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황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황주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천주면(天柱面) 외두리(外斗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47세로 1873년생으로 추정된다. 황주군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일 천도교 중화교구의 최창룡(崔昌龍)이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황주에 와서 천도교 황주교구장 김성준(金聲駿)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최창룡이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상황과 함께 독립선언서 10매를 전달하자 김성준은 즉시 황주면(黃州面) 천도교 지도자들과 논의한 후 3월 2일 남천시장(南川市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황주면의 천도교 주요 인물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기로 하였다. 이 때 김성준의 연락을 받고 교구당으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였고, 교구당에 있던 천주면 경천리(敬天里)의 홍순극(洪淳極)을 비롯하여 최상각(崔尙珏)·박인배(朴仁培) 등과 만세시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황주면 장날인 3월 2일 성남리 남천시장 곳곳에 독립선언서가 나붙었다. 오후 2시 경 황주군 전역에서 온 수백여 명의 군중들이 남천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같은 동네의 김성률(金聖律)·홍순극 등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황주경찰서 쪽으로 행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강형섭(康亨燮)과 김병식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에 시위대는 경찰서로 가서, 끌려간 두 사람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자, 시위대는 경찰서를 향해 돌을 던졌다. 또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간 시위대는 유리창을 깨드리고, 한국인 경찰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도 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기독교 예배당까지 행진하여 대열을 정돈하였다. 나희풍(羅喜豊)이 독립선언서의 취지에 대해 설명한 후, 기독교인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애국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친 시위대는 남천시장으로 복귀하여 시위를 마무리하였다. 그 후 천도교인 200여 명은 천도교 황주교구로 집결하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은 소방조(消防組)까지 동원하여 순찰과 감시를 강화하는 한편, 천도교인의 집을 수색하기도 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으로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오후 5시 경 일제 경찰과 헌병은 이 날 만세시위의 주도자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천도교 황주교구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교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천도교인과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끌고갔다. 그 과정에서 80여 명의 천도교인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9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