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용흡

金湧翕

1880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용흡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함흥(咸興)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함흥군 주지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주지면(朱地面) 계동리(溪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의하면 1880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함흥군 주지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함흥의 만세시위는 1919년 2월 28일 중하리교회(中荷里敎會)에 회집한 함흥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이 준비를 위한 자금 조달과 준비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함흥고등보통학교(咸興高等普通學校), 함흥농업학교(咸興農業學校), 영생중학교의 3·4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도 3일 새벽 4시 30분 서함흥역(西咸興驛) 앞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사전 계획된 두 만세시위와 무관한 시위가 3월 2일에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3월 3일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산학우회 간부들이 모두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지면 지경리(地境里)에서는 기독교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4일과 6일 각각 70여 명과 250여 명이 참가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후 지경리 장날이었던 3월 20일 오후 2시, 기독교인과 학생이 주축이 된 300여 명의 군중들이 다시 장터에 모였다. 주지면 계동리(溪東里)의 김국보(金國輔)가 만세시위를 주도하자, 이때 시위에 참여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시위대와 함께 주지면 흥상리(興上里)의 지경리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주재소 앞에 도착해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불응하였고, 경찰이 공포탄을 발사하면서 주도자를 검거할 때 붙잡혔다. 1919년 6월 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0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