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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金度演

1894. 6. 16 ~ 1967.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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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도연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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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김포(金浦)일본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김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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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유학생학우회
  • ·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 · 조선학회
  • · 반도중학회
  • · 신아동맹당
  • · 조선청년독립단
  • ·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 · 재미조선문화회
  • · 조선물산장려회
  • · 한국민주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2
  • · 8독립선언
  • · 조선어학회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4년 6월 16일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염창리(鹽倉洞)에서 아버지 김종원(金鍾遠), 어머니 초계 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상산(常山)이다. 7세부터 3년간 종조부에게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배우다가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다. 1908년 사립태극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신학문을 배우며 축구도 즐겼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토론회를 개최하거나 외부 강연회를 들으러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형성해나갔다. 1910년 노(盧)씨와 결혼하였다. 졸업 즈음 선생님으로부터 일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선뜻 결심하지 못하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험 공부를 한 후 이듬해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 3학년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1917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경제학과(理財科)에 입학하여 예과·본과에서 수학하였다. 도쿄 유학 시절 내내 각종 유학생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백남훈(白南薰), 전영택(田榮澤) 등과 함께 중등학교 유학생 친목단체 반도중학회를 조직하여 강연회 및 웅변대회 등을 개최하였다. 대학 재학할 때 장덕수(張德秀), 김철수(金錣洙) 등 한국인 유학생과 중국 및 타이완 유학생이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에서 회계를 맡았다. 김철수(金喆壽)·백남훈·나용균(羅容均) 전영택 등과 활동한 조선학회에서 회계 및 서기를 맡았다. 유학 중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의 이사 및 회장으로 활동하며 야구단 감독으로 고국 원정경기에 참여하고 졸업생 축하회 때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연설도 하였다. 도쿄의 유학생을 총망라하는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는 평의원, 총무 및 서무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2·8독립선언 때 최팔용(崔八鏞)·이종근(李琮根)·송계백(宋繼白)·이광수(李光洙)·최근우(崔謹愚)·김철수(金喆壽)·김상덕(金尙德)·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윤창석(尹昌錫)과 함께 11인의 조선청년독립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총회를 구실 삼아 열린 자리에서 「민족대회소집청원서」 「선언서」와 함께 준비된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주도자들은 도쿄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출판법 위반으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아 이치가야(市)ヶ谷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0년 3월 26일 출옥하였다. 같은 해 7월 여름방학을 맞아 학우회 주최 및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유학생들의 고국하기순회 강연대회가 개최되자 연사로 참여하였다. 이 대회가 7월 18일 서울 단성사(團成社)에서 열린 첫날, ‘조선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 도중, 종로경찰서장이 치안 방해를 이유로 보안법 제2조를 들어 강연을 중지시키고 대회를 해산시켰다. 1921년 도쿄에서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일본에서의 학업 및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 소재 웨슬리안대학 3학년으로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1924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시기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에 가입하여 기관지 『우라키』 창간호의 사회과학부 담당 편집부원을 맡았고, 총회의 사교부장, 이사부 이사, 영문회보 통신원, 부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4년 뉴욕대한인교민단이 조직되자 가입하여 장덕수·윤홍섭(尹弘燮) 등과 활동하였다. 대한인동지회에 가입한 이듬해 인 1928년 윤치영(尹致暎) 등과 동지회 뉴욕지부를 설립하였다. 1927년 미국의 실업계 인사들과 함께 유미한인산업협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산업(産業)』을 발행하였다. 1928년 뉴욕에 거주하는 동포 및 유학생과 함께 이승만(李承晩)·서재필(徐載弼)을 고문, 허정(許政)을 사장으로 내세운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부를 맡았다. 워싱턴 소재의 아메리칸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한국의 농촌 경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재학 중에 재미조선문화회 조직에 참가하였다. 컬럼비아대학에 조선도서관을 설립하고자 윤홍섭을 기성위원장으로 추대하고, 허정·유억겸(兪億兼)·오천석(吳天錫) 등과 함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원론』과 『경제학사』 등을 2년간 가르쳤고, 193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조사부, 뉴욕 컬럼비아대학 내 조선도서관 후원회 위원,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 사업회 발기인 등으로 참여하였다. 1935년 조선경제학회 사업위원회 임시상무, 1936년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회 위원 등으로 교육과 학술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1935년 조선제사회사(朝鮮製絲會社) 감사역을 맡음으로써 실업계 활동을 시작하였다. 2년 후에는 유학 시절의 지인들과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전무 및 취체역(取締役)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이듬해 1월 홍원경찰서로 이송되어 약 1년 동안 취조 심문을 받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43년 9월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4년 제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은 후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한국민주당 총무,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재정경제 의원, 1948년 제헌의원,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신민당, 자유민주당, 민중당 등 야당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주요 저서는 회고록인 『나의 인생백서(人生白書)』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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