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득
金盛得1923. 6. 23 ~ 1983. 1.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와룡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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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923년 6월 23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현 김해시) 진영면(進永面) 진영리(進永里)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기에는 금원초웅(金原初雄)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한인에 대한 민족 차별을 몸소 경험하고 민족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42년 9월경 도쿄의 해군경리학교 건설공사장에서 건설노무자로 일하던 중 같은 곳에 거주하던 이무웅(李武雄)과 삼촌충승(杉村忠勝)을 수차례 만났다. 한국의 독립이 곧 한국인의 행복이며, 한국 청년은 동지들과 함께 독립 의식을 키워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나고야시에 있는 중경법률학교에 입학하기로 하고, 1942년 10월경 이무웅과 함께 거주지를 나고야로 옮겼다. 나고야 가와이고등보습학교(河合高等補習學校) 야간부에 입학해 공부하였다. 동지로 태전정행(太田政行)과 고산해일(高山海日)을 만나 직장 등에서 회합하며 독립운동에 대해 모의하였다. 특히 1942년 11월, 아이치시계제조주식회사(愛知時計製造株式會社) 에이토쿠(永德)공장 건설공사장에서 동지 세 명과 비밀결사 와룡회(臥龍會)를 조직하였다. 네 사람이 조직의 지도를 맡기로 했다. 독립을 위해 서로 상부상조할 것, 예절을 숭상하고 강건할 것, 운동은 신중하고 용의주도하며 비밀리에 행할 것을 회칙으로 정하였다. 직장과 여러 장소에서 회합하며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논하였다. 국외의 정세를 연구하고 러시아와 중국에 잠입해 한인 동지를 모으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 시도 및 남방에서 자금을 모집하는 등 회원 각자의 역할 분담도 정하였다. 이 중 일본 내의 한인 청년을 선동해 동지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와룡회는 일본 내의 한인 노동자와 학생을 대상으로 민족 차별을 폭로하고 시국 문제를 공유하는 활동을 하며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주로 나고야 일대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선전과 계몽 활동을 지속하였다. 아울러 조직의 확대에도 노력해, 1943년 7월까지 9명의 동지를 추가로 규합하였다. 비밀결사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3년경부터 합법 단체로 위장해 활동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한인의 복리를 추구하며 민족 차별 해소를 위해 동등한 권리를 일본 정부에 건의하고 한·일 민족 일체를 도모한다는 취지를 표방하며 소화속진대(昭和速進隊)라는 단체를 결성하려 했다. 한인 학생에게 ‘한국 청년은 일제의 압박을 배척하고 항거하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학업에 정진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한 일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43년 7월 31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8월까지 동지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1944년 7월 29일 나고야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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