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운
金碩運미상 ~ 1919. 3.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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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6)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와 본적은 미상이다. 1919년 3월 30일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古寧朔面) 구창동(舊倉洞)의 영산시장(永山市場)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에 참여해 총탄을 맞고 사망한 것으로 보아, 고령삭면 혹은 인근 지역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접경지역인 의주군은 철도 부설 등으로 신의주가 발전하면서 쇠락하였다. 반면에 지리적 특성상 독립운동가들도 만주로 건너가 한국인 정착민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 접경한 의주도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한편 의주 지역에는 기독교가 일찍부터 전래되어 많은 기독교 조직이 있었다. 그 가운데 동교회(東敎會)는 3·1운동의 민족대표인 유여대(劉如大)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김병조(金秉祚) 등과 함께 2월 중순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개최된 평북장로회 노회에 참석하여,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운동의 거사 계획을 듣고 이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설립한 양실학교(養實學校) 교사인 정명채(鄭明采)·김두칠(金斗七)과 중국 안둥(安東,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으로부터 건너온 김병농(金炳穠) 목사 등 20여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유여대 등은 2월 28일 오후 9시경 의주면 의주읍내의 양실학교에서 3월 1일 의주군에서 거행될 독립선언식에 관한 세부사항을 협의하고 결정하였다. 또한 만세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선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윽고 1919년 3월 1일 양실학교 운동장에 700~800명의 인원을 모으고 만세 시위를 진행하자, 천도교인들도 합류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증가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주도자들을 연행하였으나, 이후에도 양실학교 학생·천도교인·장꾼 등이 주도하는 시위가 남문 밖에서 이어졌다. 한편 고령삭면에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 조직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고령교회의 지도자인 이원익(李元益) 목사는 유여대·김병농 등과 함께 시위에 찬동했던 인물이었다. 비록 이원익 목사는 초기 만세 시위에서 검거를 피해 망명하였지만, 동년 3월 30일 고령삭면의 기독교인·장꾼 등은 영산시장 개시를 이용해 만세 시위를 다시 전개하였다. 정오 12시경 영산시장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에는 3,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영산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 시위에 참여하면서,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행진을 이끌면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저지하는 일본 헌병과 한국인 보조원들의 무자비한 발포로 인해 장인국(張仁國)·황수정(黃守貞)·허창준(許昌俊)·백성아(白姓兒) 등과 함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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