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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호

金鳳鎬

1884. 11. 9 ~ 1950.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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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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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榮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노동공제회 영주지회
  • · 풍기소작조합
  • · 풍기청년회
  • · 조선노동연맹회
  • · 조선노농총동맹
  • · 경북사회운동자동맹
  • · 영주군 노농교육연구회
  • · 신간회 영주지회
  • · 풍기농우동맹
  • · 영주농민조합
  • ·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
  • · 영주군 인민위원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풍기소작조합 지세불납투쟁
  • · ‘상주공산당 사건’
  • ·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884년 11월 9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풍기면(豐基面) 금계리(金鷄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동필(金東弼)이다. 9세부터 12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으며,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1922년 2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영주지회(榮州支會)를 설립하고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3년 풍기소작조합(豊基小作組合) 결성에 참여하여 3월 2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 제2회 정기총회에 풍기소작조합 대표로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에는 풍기소작조합을 대표하여 조선노농총동맹준비회(朝鮮勞農總同盟準備會)의 발기단체로 참석하였다. 1924년 4월 18일에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설립에 참여하였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풍기청년회(豊基靑年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경북사회운동자동맹(慶北社會運動者同盟)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5월 풍기소작조합원들과 함께 악덕 지주와 마름의 소작권 이동에 대항하여 지세불납투쟁(地稅不納鬪爭)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마름 5~6인이 인솔한 신작인(新作人) 60여 명과 구작인(舊作人) 100여 명이 대치하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25년 5월 풍기소작조합을 중심으로 영주군 노농교육연구회(勞農敎育硏究會)를 조직하였는데, 농민에 대한 교육 보급 및 지식 향상 도모, 문화생활 촉진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이와 같은 영주 지역의 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1925년 7월 24일 영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26년 2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업무방해 및 소요죄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7년 8월 29일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가 설립될 때 참여하여, 전형위원과 조직선전부(組織宣傳部) 상무간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신간회 영주지회 정기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7월 30일에는 검사위원 겸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풍기소작조합은 이후 풍기농우동맹(豐基農友同盟)으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1928년 2월 5일 제2회 정기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풍기농우동맹은 조선농민총동맹의 산하기관이었다. 이후 농민운동이 군 단위의 단일한 농민조합을 결성하는 방향 전환을 추진하자, 1929년 3월 9일 풍기농우동맹 제3회 정기대회에서 풍기농우동맹을 해체하고, 영주농민조합(榮州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4월 말경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경상북도기관을 결성하려 했다는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되었다가, 5월 말경에 석방되었다. 같은 해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30년 3월 29일 서울의 학생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같은 해 6월 이른바 ‘상주공산당(尙州共産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면소(免訴)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서울의 신간회 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직후인 1931년 8월, 영주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다니던 박승원(朴勝源)으로부터 서울의 운동 상황을 듣고 영주에서도 혁명적 대중조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같은 해 9월부터 김계등(金季登)·김화진(金華鎭)·박병성(朴炳星)·정규찬(丁奎燦) 등을 만나 비밀결사 영주적색농민조합(榮州赤色農民組合) 및 반제동맹(反帝同盟)을 결성하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당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후 모임 때는 본인 대신 김준상(金俊相)을 대리로 참석시켰다. 1932년 4월 영주에서 혁명적 농민조합 및 반제동맹조직에 앞서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6월경 김준상을 경북 예천(禮泉)의 한일청(韓一淸)에게 보내 한일철·박호철(朴鎬哲)·김기석(金己石) 등과 함께 예천에서도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32년 7월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에 발각되어, 영주경찰서 및 예천경찰서 등에서 무려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같은 해 9월 19일 72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구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2월 예심이 종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동지 11명과 함께 변호사선임을 거부해 1년가량 재판이 열리지 못하였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35년 8월 11일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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