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金東春미상 ~ 193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간회 성진지회
- · 성진청년동맹
- · 성진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성진농민조합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 학상면(鶴上面) 옥천리(玉泉里)에서 김하용(金夏鎔)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편, 1912년에 태어났다는 견해도 있다. 간도의 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성진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9월 설립된 신간회 성진지회와 성진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12일 성진청년동맹 학중지부(鶴中支部)를 설치하고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2월 15일 성진청년동맹 학남남부지부 소년부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단옷날에 성진군 학남면(鶴南面) 용대동(龍臺洞) 청년동맹회관에서 동지들과 함께 혁명가(革命歌)를 고창하였다. 이 때문에 같은 달 18일 성진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과료(科料) 5원을 내고 풀려났다. 신간회 성진지부와 성진청년동맹의 조직원을 기반으로 1931년 5월 새롭게 성진농민조합을 결성하였다. 성진읍 욱정(旭町)에 있는 중앙예수교예배당에 본부를 둔 성진농민조합은 소작료 인하 투쟁, 채권문서 탈취 및 소각 투쟁, 스파이 징벌 투쟁, 야학 철폐 반대 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 조합은 1932년 1월 산하에 농민조합본부임시통제위원회와 지도위원회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하부 조직으로 7개 면에 14개의 지부와 45개 반(班)이 설치되었다. 2,000여 명의 조합원을 규합하여 항일 대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성진 지역에서는 6~7세의 어린아이들조차 혁명가를 부르고 다닐 정도로 농민조합의 대중적 기반은 두터웠다고 한다. 성진농민조합의 조직 활동과 대중 투쟁이 강화되자, 1931년 9월 이래 성진경찰서에서는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대규모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2년 무렵 체포된 것으로 보이며, 그해 9월 25일 이규송(李奎宋) 등과 함께 기소되었다. 당시 이른바 ‘성진농민조합 사건’으로 최종적으로 검거된 인원은 총 334명이었고, 기소된 인원은 137명이었다. 성진농민조합 사건으로 검거된 조합원들과 함께 오랜 기간 성진경찰서와 청진형무소에 미결수로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청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933년 8월 30일경부터 폐결핵에 걸려 1년간 고생하다가, 1934년 9월 19일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직후인 같은 달 26일 향년 2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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