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흠
金道欽1887. 9. 23 ~ 1933. 4.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간도국민회
- · 신간회
- · 성진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관련 사건
- · 제1차 성진농민조합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0) 1887년 9월 23일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 학성면(鶴城面) 장현리(將峴里)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사립 중화중학교(中化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20년에는 면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1920년 6월 하순경 중국 옌지현(延吉縣)에 본부를 둔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에서 국내 연락망 확보와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파견한 황상봉(黃尙鳳)을 유훈상의 소개로 성진면 조승화(趙承和)의 집에서 면회하였다. 황상봉은 성진 지역에 간도국민회의 통신 연락사무소 설치 협조를 요구하자, 함께한 유훈상·조승화와 논의하여 조승화의 집에 이를 설치하고 통신원으로 활동하기로 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어 1920년 8월 16일 함흥지방법원 성진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 징역 2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20년 10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927년 5월에는 학성면 장현동의 사립 장현학교(將峴學校)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경비 부족으로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동민대회 개최를 통해 동비(洞費)보조금을 받도록 추진하여 학교를 정상화시켰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 신간회(新幹會)가 출범하자, 9월 10일 성진지회(城津支會)를 창립하였다. 11월에는 성진소비조합(城津消費組合)을 창립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12월 신간회 성진지회 제1회 정기대회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29년 6월 열린 신간회 전국복대표전체대행대회(全國複大表全體代行大會)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신간회 성진지회는 1929년 12월 제4회 정기대회에서 신간회 운동의 이론 비판과 과오 청산, 행동강령 수립 등을 중심 과제로 설정하면서 본부의 운동 방향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1930년 2월 초 『중외일보』 성진지국을 설치하고 지국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신간회 성진지회 집행위원회에서는 본부 제3회 집행위원회가 비전투적이고 타락한 간부들의 비합법적인 권력 남용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동시에 대중의 전투력을 상실시켰다고 비판하며, 중앙집행위원회 및 집행위원불신임을 결의하였다. 또한 신간회 구성원은 다양한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단일한 목적과 일치된 행동이 나올 수 없어 투쟁성이 결여되었으므로 이를 해소하고 직업별로 단결되고 이해가 공통된 단체를 결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1931년 3월 13일 신간회 성진지회 해소를 의결하였다. 1931년 5월 30일 성진군 학서면(鶴西面)에 국한되어 활동 중인 북성농민조합(北星農民組合)을 개조하여 성진군 전체로 활동 범위를 확대하며, 한국의 독립 및 새로운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비합법적·혁명적 농민조합인 성진농민조합(城津農民組合)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성진농민조합은 소작료 인하 투쟁, 채권문서 탈취 및 소각, 스파이 징벌 투쟁, 야학 철폐 반대 투쟁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후 성진군 내 14개의 지부, 약 45개의 반으로 세포조직·가맹자가 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성진군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성진농조의 세력이 확산되자 일제 경찰의 탄압이 강화되어 1931년 10월 9일 이규송(李奎宋)·김학걸(金學傑) 등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1년 가까이 성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취조받았지만, 1932년 9월 19일 청진지방법원 검사국으로부터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검거되어 조사받던 중 얻은 병으로 투병하다, 1933년 4월 14일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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