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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제

金輿濟

1900. 5. 29 ~ 1968.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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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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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정주(定州)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정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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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유학생학우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흥사단 원동위원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3.1운동
  • · 동우회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1900년 5월 29일에 태어났다. 다만,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95년 5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안흥면(安興面) 안의동(安義洞)에서 아버지 김정간(金鼎澗)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이명은 유암(流暗)과 한자가 다른 김여제(金與濟)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였고 고향에서 줄곧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8년까지 고향 의숙(義塾)에서 한문을 익혔다. 1909년 정주의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였다. 졸업한 해 바로 서울 경성상업학교(京城商業學校)에 진학하였고,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중앙기독청년회(中央基督靑年會), 경성일어연구회(京城日語硏究會) 등 학회 및 청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최남선(崔南善)이 신문관(新文館)에서 『소년(少年)』(1908. 11~1911. 5, 통권 23호)에 이어 발행하였던 계몽잡지 『붉은 져고리』(1912. 8~1913. 6, 통권 12호)의 편집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3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1년 동안 다녔다. 1915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도쿄에서 동창생인 이광수(李光洙)·현상윤(玄相允)·장덕수(張德秀)·백낙준(白樂濬) 등과 교류하며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에서 활동하며,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8년 6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9월부터 황해도 재령(載寧) 명신학교(明新學校) 교무주임으로 교육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5월부터 1921년 8월까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원(國務院) 비서, 임시사료편찬회 간사(幹事), 외무부 선전위원,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 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7월에는 안창호(安昌浩)·이광수 등이 한국인의 독립운동 사실을 국제연맹에 제출하고,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임시정부 내에 임시사료편찬회를 조직하였다. 이 편찬회 간사로 선임되어 편찬위원 김두봉(金枓奉)·김병조(金秉祚)·이원익(李元益)·장붕(張鵬)·김한(金翰)·박영근(朴永根) 등과 함께 사료 편찬에 착수하여 그해 9월 23일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 전 4권을 만들었다. 1919년 9월 2일 개최된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국내외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정책 홍보를 위하여 국무총리 직속 하에 외무부 선전부를 설치하자, 위원으로 선임되어 서무 백남칠(白南七), 교섭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1921년 10월까지 선전 사무를 담당하였다. 3일 뒤인 9월 5일 황진남(黃鎭南)·송정욱(宋鼎頊)·박현환(朴賢煥)·이화숙(李華淑)·김원경(金元慶) 등이 국무원 참사로 임명될 때, 외무부 참사로 임명되었다. 1920년 5월 27일 이광수·주요한(朱耀翰)과 함께 안창호(安昌浩)가 이끌던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였다. 이때부터 평생 동안 안창호를 존경하며 흥사단 활동을 하였다. 1922년 봄 “구국의 길은 수학(修學)과 인재 양성에 있다”라는 안창호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대학원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1925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된 흥사단대회에 안창호·한승곤(韓承坤)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9년 콜롬비아대학원에서 중등교육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결혼하여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의 위촉으로 정주 오산중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요시찰인물로 지목받아 7개월 만에 강제로 퇴임당하였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75일간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잠시 일하다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에 재직하였다. 1943년 12월부터 1946년 5월까지 인도네시아에 가 있었던 것으로 이력서와 약력에 적혀 있으나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1947년부터 1년 동안 콜롬비아대학원에서 수학하고 1954년까지 미국 국무성 소속 ‘미국의 소리’ 방송국 편집관 및 번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955년부터 사설 영어학원을 경영하다가 1959년 4월 이후 인하공과대학(仁荷工科大學)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8년 10월 독일 괴테대학원에 연구차 갔다가 10월 31일 그곳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 조선유학생학우회 시절 『학지광』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상하이에서 『독립신문』 기자 및 편집위원으로 활동할 때도 『독립신문』에 시를 발표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상해판 『독립신문』에 3·1운동을 노래한 「3월 1일」과 「오오! 자유」라는 시를 게재하여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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