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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득

金榮得

1908. 9. 22 ~ 1940.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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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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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선산(善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선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 · 조선영화예술협회
  • · 신흥영화예술가동맹
  • · 신건설사
  • · 구인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신건설사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1908년 9월 22일 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 고아면(高牙面) 원호리(元湖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유영(幽影)이다. 1920년대 연극·영화·문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붙잡혀 고초를 겼었다. 구미보통학교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우 이갑기(李甲基) 등과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퇴학당하였다. 이후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에 편입하여 1925년 3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영화계에 투신하여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문예활동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27년 9월 서울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연극부에 가입하여 1930년 4월경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즈음 안종화(安鍾和)·이우(李愚)·이경손(李慶孫) 등이 영화예술 연구를 위해 조직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입하고 카프 계열의 영화인들을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1929년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설립하였다. 1928년 신경향파(新傾向派) 계열의 최초의 영화로, 일제의 압제 하에서 땅을 빼앗기고 유랑하는 처지에 놓인 농민들의 고통과 저항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 「유랑(流浪)」 의 감독을 맡았다. 1929년에는 노동자 계급의 비극적 운명과 해방 투쟁을 그린 「혼가(昏街)」 를, 1931년에는 「화륜(火輪)」 을 연출하였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하였지만, 이를 통해 무산계급 영화 제작을 전국적으로 파급시켰으며 대중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32년 8월 서울에서 신고송(申鼓頌)·추완호(秋完鎬)·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신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 이동극단(移動劇團) 형태의 비밀결사 신건설사(新建設社)를 조직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프로’ 연극인들이 참여했던 극단 신건설사는 “프롤레타리아 연극 건설”이라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합법적인 극장 공연을 우선 할 것인가 비합법적 활동을 위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이때 명확한 입장은 확인되지 않는데, 신건설사 참여 후 2~3개월 만에 탈퇴하였다. 1933년 8월 이종명(李鍾鳴)과 함께 구인회(九人會) 조직을 발의하여(당시 유영(幽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이효석(李孝石)·이무영(李無影)·유치진(柳致眞)·이태준(李泰俊)·조용만(趙容萬)·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였다. 구인회는 문학사에서 순수문학의 흐름을 계승 발전시켜 1930년대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종명·이효석과 함께 탈퇴하였다. 1934년 8월 26일 사실상 카프 해체의 계기가 된 ‘신건설사 검거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5년 6월 28일 약 1년 만에 예심(豫審)이 종결되어 그 해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그 해 12월 9일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년 4개월간의 옥고 끝에 1935년 12월 16일 전주형무소에서 풀려났다. 1938년 이구영(李龜永)·이명우(李明雨)·김태진(金兌鎭)·안종화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를 개최하였으며, 1939년에는 최금동(崔琴桐)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애련송(愛戀頌)」 을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 재기하였다. 이후 의정부에서 조선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첫 작품으로 「수선화(水仙花)」 를 완성하였으나, 개봉을 며칠 앞둔 1940년 1월 4일 사망하였다. 오늘날 영화계에서는 나운규(羅雲奎)·윤백남(尹白南)·안종화·김상진(金尙鎭)·이규환(李圭煥) 등과 함께 무성영화 시대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한국 영화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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