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金東洙1916. 12. 6 ~ 1982. 2.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 · 한국광복군 제2지대
- · 주화대표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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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916년 12월 6일 대대로 강화(江華)에 살아온 양반 가문에서 김우제(金宇濟)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이명은 김강(金剛)이다.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식과 기독교의 종교적인 신앙심이 농후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8세 때인 1923년 더 자유로운 선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파송되는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 다녔다. 인성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소년 독립운동 단체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경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昂)의 지도로 조직된 소년단체 화랑사(花郞社)에 참여하였다. 화랑사는 화랑정신을 통한 소년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를 내걸었으며, 상하이 한인 소년 23명이 김철(金澈)의 조카 김덕근(金德根)을 책임자로 하여 국권 회복을 표방했던 단체였다. 인성학교 졸업 후 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에 다녔다. 동시에 학생 신분으로 상하이에서 전개된 중국의 항일 구국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32년 제1차 상하이사변에서 중국군의 항전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1934년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독립전쟁의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뤄양분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김구의 특무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안공근(安恭根) 등 약 30명과 함께 난징(南京) 성내 가오안리(高安里)에서 거행한 특무대 발대식에 참가함으로써 특무대 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뤄양분교를 졸업한 후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사관으로 근무하였다. 중국군에 복무하던 중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난징에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피란 가는 과정에서 다른 젊은 청년 장교들과 함께 임시정부 대가족을 보호하고 김구 등 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피란 중 광시성 류저우(柳州)에서 젊은 한인 청년들로 구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10월 충칭(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河有)·박기성(朴基成)·이재현(李在賢) 등과 함께 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부대장(副隊長)이 되었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2월 전선과 가까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였다. 1940년 5월부터 이재현·김천성(金天成)·박영진(朴永晋)·김용주(金容珠)·이월봉(李月峰)·이삼여(李三女) 등의 대원과 함께 일본군 제36사단이 주둔한 루안(潞安)을 비롯하여 도청선 철로를 중심으로 하는 신샹(新鄕), 자오주오(焦作), 쉬우(修武), 장즈(長治) 등지에서 초모공작(招募工作)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신설된 광복군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대장이 되어 시안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초모·선전·정보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3월 1일 지대장 나월환이 지대 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휘하 대원들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에 본의 아니게 연루되어 무기 징역형을 받았다가 석방되어 다시 광복군 군사 활동에 투신하였다. 나월환 사건과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등의 결과로 1942년 4월 1일 새로이 편성된 제2지대에 편입되어, 신입 대원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박기성·유해준·송호성 등과 함께 중국 화북 지방의 전방에서 초모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충칭 인근에 토교대(土橋隊)를 설치함에 따라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토교대의 주요 임무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 호위·광복군의 간부 요원 교육과 양성 그리고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한 초모 활동 등이었다. 1945년 8월 충칭에서 일제의 패망 소식을 접하였다. 광복 후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상하이 지당부 특파원 등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특히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동북특파원으로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교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6월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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