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睦
永睦1870. 5. 7 ~ 1944. 1.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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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0년 5월 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현 안동시) 임북면(臨北面) 마동(馬洞, 현 안동시 임동면 마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이명은 김정식(金正植), 호는 근심(謹心)이다. 안동면의 만세시위는 기독교계와 유림계의 연합으로 준비되었다. 안동교회 목사 김영옥(金泳玉), 장로 이중희(李重熙)는 도쿄 유학생 강대극(姜大極)과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金元鎭)과 도모하여 3월 13일 안동면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준비를 진행하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학생인 김재명(金在明)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하여 아버지인 안동교회 장로 김병우(金炳宇)와 함께 시위 준비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만세 모의가 발각되어 강대극, 김원진, 김영옥, 이중희 등이 붙잡혔다. 다행히 검거를 피한 김병우는 안동교회 신자들과 함께 다음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였다. 유림들도 김병우와 연락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협동학교(協東學校), 보문의숙(寶文義塾),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도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낮 12시 경 기독교인 30여 명이 곡물전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남문통과 북문통을 오가며 행진을 벌였다. 유림들이 이끄는 시위대가 동문통부터 행진하여 합류하였다. 경찰과 군인이 검거에 나서 14명이 붙잡혔다. 오후 4시 무렵 기독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명을 요구하며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다. 밤이 되면서는 시위군중이 더욱 많아져 2,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관공서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이자 경찰과 수비대가 총을 쏘았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혔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동일한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다시 “조선 신민으로서 조선독립에 대해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부른 것뿐이고 보안법 위반이 될 만한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당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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