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락
金永洛1896. 6. 17 ~ 1959. 9. 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철산기자단
- · 철산금융조합
- · 철산소비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철산군 독립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6월 17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철산면(鐵山面) 동부동(東部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철산군 만세운동 당시도 고향에 거주하면서 잡화상을 하였다. 1919년 2월 28일경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를 전달받고 백량면(栢梁面)에 거주하는 정병호(鄭炳鎬)를 집으로 불러 20여 매를 나누어주고, 이후 철산군 여러 지역에 배포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사립명흥학교(明興學校) 교사인 안태영(安泰英)과 함께 1919년 3월 7일 철산면 장날에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추도식을 열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안태영·안봉국(安奉國)·심치경(沈致璟) 등의 기독교인, 정구석(鄭久錫) 등의 천도교인, 김정찬(金鼎贊)·정익(鄭翊) 등의 일반 주민 대표들과 동부동(東部洞) 유봉영(劉鳳榮) 집에서 3~4차례에 걸쳐 비밀회의를 가졌다. 3월 6일 밤 철산면 동부동 이재근(李載根) 집에서 안태영·안봉국·김태명(金泰明)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그 중 200매는 안봉국이 맡아 7일 만세를 부를 때 배포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7일 정오 철산면 읍내에서 열린 광무황제 추도식이 끝나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추도식에 참석한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이 때 모인 약 5,000명의 면민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대열을 이루어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들이 제지하려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시위대는 철산우편국(鐵山郵便局)에 돌을 던지는 한편 작은 칼 등을 지니고서 공세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일제는 철산면 경찰을 동원한 것은 물론 철도엄호대(鐵道掩護隊)에서 보병 7명, 정주군(定州郡)에서 보병 10명을 추가로 지원하였다. 이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며 무력 진압에 나섰고, 오후 1시 40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후 정주엄호대(定州掩護隊)의 장교와 군인 10명이 철산으로 파견되어 경계가 강화되었고, 이때 주민 7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 일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의 1심을 거쳐, 1919년 5월 3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1925년 철산군청과 경찰서 이전을 반대하는 시민대회의 실행위원, 철산 운암친목회(雲暗親睦會) 회장, 철산기자단(鐵山記者團) 회장, 철산금융조합(鐵山金融組合) 평의원, 철산소비조합(鐵山消費組合) 이사, 철산각희운동회(鐵山脚戱運動會)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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