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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榮斗

榮斗

1870. 11. 25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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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榮斗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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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永興)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영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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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6)

관련 사건

  • · 영흥군 횡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6) 1870년 11월 25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횡천면(橫川面) 천흥리(泉興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고향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영흥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2월 28일 저녁 서울에서 안상덕(安商悳)이 천도교 영흥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시작되었다. 안상덕은 천도교 중앙총부의 이종일(李鍾一)로부터 강원도와 함경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인물이다. 천도교 영흥교구 교구장 김용환(金龍煥)은 영흥지역 천도교의 주요 인물들과 논의하여, 영흥면의 면 소재지인 남산리(南山里) 장터에서 3월 5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3월 2일 영흥 읍내에 독립선언서가 배부되는 일로 인해 일본 경찰의 경계가 강화되면서 만세시위는 원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남산리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하여 시위를 전개한 3월 10일이었다. 3월 16일과 17일에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때부터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17일 영흥 읍내에 갔다가 면민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횡천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같은 면 덕평리(德坪里)에서 거주하던 김경팔(金京八)과 서달호의 집에서 만나 만세시위 전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3시 경 김경팔과 함께 횡천면의 면 소재지인 대평리(大坪里)의 사립동흥학교(私立東興學校)로 가서 교사 김상민(金相敏)을 만났다. 그리고 그 날 밤 7시 만세시위를 전개할 예정이니, 그 때 동흥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김경팔과 함께 면 서기인 임승후(林昇垕)와 대평리에 거주하는 한철호(韓喆浩)에게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홀로 한수길(韓秀吉)을 찾아가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김경팔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7일 함흥지방법원 영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10월을 받았다.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은 한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따라 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1심과 2심 판결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상고하였다. 같은 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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