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열
金聖烈1871. 11. 3 ~ 1919. 4.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3.1운동
- · 제암리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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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71년 11월 3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팔탄면(八灘面) 고주리(古洲里, 현 화성시 팔탄면 고주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충정대부를 역임한 김충식(金忠植)이다. 형 김흥렬(金興烈)은 당시 수원지역 천도교 최고지도자였으며, 동생 김세열(金世烈)과 함께 천도교 신자였다.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鄕南面) 발안리(發安里) 발안장터에서 형 김흥렬, 제암리(堤巖里)에 사는 안종환(安鍾煥), 팔탄면 가재리(佳才里) 사는 유림인 이정근(李正根)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장을 보러 온 주민들이 냇가에서 돌을 주워 주재소 주위로 날랐다. 이정근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앞으로 가 투석을 하자 주재소 순사들이 위협 사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계속 돌을 던져 주재소 유리창이 깨졌다. 그때 수원에서 수비대 1개 소대 병력이 도착하였다. 수비대의 칼과 총에 의해 이정근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무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31일 만세 시위 이후 발안장 주변에는 봉화 시위가 잇달았다. 4월 1일과 2일 사이에 향남면, 팔탄면, 우정면(雨汀面), 장안면(長安面) 일대에서 봉화 시위가 잇달아 벌어졌다. 4월 3일에는 장안면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우정면으로 확대되어 장안과 우정 양 면사무소가 시위 군중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어서 시위 군중이 경찰관주재소로 몰려들자 일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흥분한 시위대가 경찰을 잡아 처단하였다. 수원 지역 만세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군대를 보내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인솔한 1개 소대 30여 명이 파견되어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관련자 체포에 열을 올렸다. 4월 13일 아리타가 인솔한 부대는 발안에 주둔하였는데, 마침 15일 발안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였다. 아리타는 한국인 순사보 조희창(趙熙彰)으로부터 제암리의 기독교도 및 천도교도들이 만세 시위와 관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암리(提岩里)로 들어가서 집단 학살을 자행하였고, 곧바로 10분 거리의 고주리로 이동하였다. 수비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 피신하지 않고 집 안에 있었다. 바로 집으로 들이닥친 수비대에 형 김흥렬과 동생 김세열, 아들 김흥복(金興福)과 조카 김주업(金周業)·김주남(金周男) 등과 함께 붙잡혀 포박된 채 집 뒤의 언덕으로 끌려갔다. 한국인 순사보 조희창이 수촌리 만세 시위 주도자였던 백낙열의 은신처를 물으며 협박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 자리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당하였고 시신도 불태워졌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 문중 사람 김시열 등이 재를 모아서 팔탄면 월문리 공동묘지에 분묘를 만들어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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