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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상

金文相

1877. 3. 1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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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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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수안(遂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수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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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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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7년 3월 18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자의리(慈儀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은 김문상(金文祥)이다. 천도교 수안교구는 1914년 대교구제가 실시되자 황해도 동부 산악지대인 신계교구, 곡산교구 등과 함께 서흥대교구 산하에 편제되었다. 이런 지역적 연관성으로 인해 수안의 만세 운동은 서흥, 곡산 등의 천도교 교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었다. 1919년 2월 28일 곡산의 천도교인인 이경섭(李景燮)이 천도교 중앙총부의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과장 이종일(李鍾一)로부터 황해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받고, 서흥군(瑞興郡)을 거쳐 수안군에 3월 1일 도착하였다. 이후 수안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경섭은 3월 1일 저녁 수안교구 공선원(共宣員)인 이종숙(李宗淑)의 집에서 수안교구장 안봉하(安鳳河)와 전 교구장 김영만(金永萬)·홍석정(洪錫禎)·홍순걸(洪淳杰) 및 공선원 나찬홍(羅燦洪)과 최용식(崔鎔植), 전교사(傳敎師) 한청일(韓淸一) 등 수안 지역 천도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이날 회합에서 이경섭은 수안에서도 서울처럼 만세 시위를 전개하라는 이종일의 지시와 함께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전달하였다. 수안의 천도교 지도부는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일 수안교구 교구실에서 회합한 안봉하, 홍석정, 김영만, 나찬홍, 한청일 등은 3월 3일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과 독립을 선언했으므로 용담리(龍潭里)의 수안헌병분대를 인도받을 것, 그리고 그 실행 방법은 홍석정과 한청일이 담당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계획은 시행 전에 수안헌병분대에 탐지되었고, 그날 오후 안봉하·김영만·최용식·나찬홍 등 수안 지역 천도교 지도부 11명이 붙잡혔다. 그 과정에서 검거를 모면한 홍석정·한청일·이영철 등은 그날 밤 수안지역의 천도교 중심인물들에게 예정과 같이 3일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임을 알렸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수안교구에는 수안면, 대천면(大千面), 연암면(延岩面) 등에서 모인 천도교인 130~140명이 집결하였다. 홍석정·한청일 등의 주도로 태극기와 깃발을 든 시위대는 독립 만세를 부르며 수안금융조합 사무소를 지나 수안헌병분대까지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한국은 독립하였으며 자유와 공화정치는 대세라고 주장하며 수안헌병분대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수안헌병 분대장은 서울 본부의 명령을 받아야 하니 일단 물러갈 것을 요청하였고, 시위대는 대표자를 남기고 해산하여 교구로 돌아왔다. 이것이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1차 시위였다. 한편 천도교인으로서 대천면 시리원(柴里院) 교구소에서 김용수(金龍洙)·이동욱(李東郁)·이재관(李在觀)·용계홍(龍桂弘)·임창운(林昌云)·이두천(李斗闡)·이시용(李時庸) 등과 함께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수안교구로 합류하였다. 그리고 오전 11시경 교구에 모인 1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헌병 분대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다시 헌병 분대의 인도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이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2차 시위였다. 이어서 오후 1시경 헌병 분대 앞에서 사상자 발생에 항의하며 150여 명의 시위대가 수안읍 3차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시 헌병대의 발포가 있었다. 이날 전개된 수안읍 2차·3차 시위에서 9명의 사망자와 1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일로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에서 내란사건으로 관할재판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하였고,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 소요, 저택 침입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항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이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1년 3개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형기 산입)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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