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오
金冕五1899. 12. 8 ~ 1981. 6.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관련 사건
- · 함흥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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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9) 1899년 12월 8일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함흥면(咸興面) 중리(中里)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3·1운동 당시 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 2학년이었다. 함흥의 만세 운동은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 교사인 강봉우(姜鳳羽)가 1919년 2월 26일 함흥에 도착하면서 준비되었다. 신창리교회(新昌里敎會)에서 함흥 지역의 목사와 장로들을 대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와 식민지 한국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향후 독립에 대한 준비를 역설하였다. 이어 원산의 광석동교회(廣石洞敎會) 장로인 이순영(李順榮)도 함흥면 중하리교회(中荷里敎會) 간부들에게 3월 1일 원산의 만세 시위 계획을 알리고 함께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2월 28일 중하리교회에 회집한 김두석(金斗錫)·김여학(金麗鶴)·김중석(金仲錫)·박성호(朴聖浩)·오명근(吳明根)·이순기(李舜基)·이영식(李榮植)·임회영(林晦榮)·조동훈(趙東薰)·조영신(趙永信)·최명학(崔明鶴)·최영학(崔榮鶴)·홍기진(洪基鎭) 등 함흥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은 만세 시위 준비를 위한 운동자금으로 5원에서 100원씩을 갹출하였다. 또한 영신학교(永信學校) 교사 이근재(李根載), 함흥기독교청년회(咸興基督敎靑年會) 서기 이순기, 전도사 조영신, 숯장수 한영호(韓泳鎬)와 홍기진을 만세 시위 준비위원으로 선정하고, 만세 시위와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를 일임하였다. 만세 시위는 3월 3일 최명학이 낙민루(樂民樓)에 올라가서 나팔을 부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구하러 원산에 갔던 조영신은 2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함흥으로 돌아와, 영생중학교에 있던 등사판을 함흥면 상리(上里) 이근재의 집으로 가져갔다. 당시 영생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이근재의 집에서 김치선(金致善)·도상록(都相祿)·박희성(朴希聖)·한명환(韓明桓) 등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3,000장을 등사하였다. 또한 만세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수십 장과 깃발 2개도 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과는 다른 만세 시위 준비도 있었다. 2월 28일 함흥고등보통학교(咸興高等普通學校), 함흥농업학교(咸興農業學校), 영생중학교 3·4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의 주요 인물인 한태연(韓泰然)·한림(韓林) 등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이후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인 강기덕(康基德)이 곽선죽(郭善竹)을 통해 보낸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3월 1일 함산학우회는 간부회의에서 결사대 조직을 결의하였다. 2일에는 중리 권영주(權永周)의 집에 모여 논의한 결과, 3일 새벽 4시 30분 서함흥역(西咸興驛) 앞에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사전 계획된 두 만세 시위와 무관하게 3월 2일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계획된 시위가 아니었음에도 많은 군중이 호응하면서 만세 시위의 규모가 커졌다. 이에 경찰은 헌병·의용소방대 및 재향군인의 도움을 받아 300여 명의 시위대를 체포하였다. 3월 2일 만세 시위에 놀란 경찰은 3일 새벽부터 함흥 전역에서 대규모의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이 검속으로 인해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기독교 지도자와 함산학우회 간부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함께 붙잡혀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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