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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선

金良善

1908. 2. 13 ~ 1970.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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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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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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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7)

관련 사건

  • · 광주학생항일운동
  • · 신사참배 거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7) 1908년 2월 13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당후동(堂後洞)에서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 김관근(金灌根)과 어머니 백관성(白灌聖)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세례교인으로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발간하고 장로교회를 세운 백홍준(白鴻俊, 1848~1893)이다. 이후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 천북동(川北洞)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매산(梅山)이다. 중원학교(重遠學校)를 거쳐, 선천에서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졸업한 후 192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에 배민수(裵敏洙)·문학린(文學麟)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청구회(靑丘會)를 조직하였다. 1929년 11월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1930년 1월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는 격문을 제작, 배포하여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9년 12월부터 평양 시내의 각 학교에서 동맹휴학이 단행되었으며, 반일 격문이 살포되었다. 경찰의 경계가 엄중한 가운데 다른 동문들과 함께 1930년 1월 18일과 22일 ‘3천 평양 남녀학생 제군에게’, ‘제국주의를 XX하라’ 등의 격문을 평양 시내와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평양사범학교 등 인근의 학교 9곳에 배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1월 22일에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학생 500여 명이 함께 궐기했고, 평양 시내 각 학교에서 학생 수천 명이 호응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숭실전문학교 학생 채정근(蔡廷根)·윤제만(尹濟萬)·송희선(宋熙善)·김형두(金炯斗) 등과 평남 용강군(龍岡郡)의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사 이능상(李能相) 등 195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다수의 학생은 며칠 동안 취조를 받은 후 석방되었으나, 주도자 10여 명은 2월 6일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이때 다행히 김봉덕(金鳳德)·강한식(姜寒食) 등과 함께 체포를 피해 은신하여 기소가 중지되었다. 그 후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는지, 궐석 재판이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나 1930년 7월 24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3개월,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있다. 이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평북 곽산군(郭山郡)의 장로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운동으로 1940년 11월 21일 평양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23일에 풀려나는 등 구금을 당했다. 또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예비검속 대상이 되었다. 한편, 숭실전문학교 재학시절부터 교회사와 고고학 연구에 몰두하여 방대한 양의 유물과 사료를 수집하였는데, 광복 후 이를 남한으로 옮겨와 1948년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 자리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설립하였다. 1960년대에는 서울 암사동 유적지를 발굴하는 등 역사학계에 기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서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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