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형
金復炯1896. 5. 13 ~ 1896. 5.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 · 대한적십자사
- · 화동한국유학생연합회
- · 남경한인학우회
- · 남화한인청년연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8)
관련 사건
- · 만보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8) 1896년 5월 13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의주면(義州面) 동외동(東外洞)에서 부친 김주(金柱)와 모친 양씨(梁氏)의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호는 오연(吾然)이고, 이명은 한자가 다른 김복형(金福炯)이다. 8세에서 14세까지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4세에 의주에 있는 사립 익원(翊原)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1921년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면서 기록한 이력서에 의하면, 아들은 김규(金圭)이고, 부인은 평북 의주군 광성면(光城面) 소류초동(小柳草洞)에 살고 있었다.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에 임명되었다. 안창호(安昌浩)가 노동국 총판 재직 시에는 노동국 서기로 유상규(劉相奎)·전지순과 그를 보좌하였다. 1921년 흥사단에 가입하였고, 원번호는 128번이다. 1921년 상하이미술학원에 입학하였다. 1922년 중국에 귀화하면서 김오연(金吾然)으로 개명했고, 상하이의 태창중학교(太昌中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동포 사회의 민족교육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4년 1월 15일 상하이미술전문학교의 4년 과정을 졸업하였다. 1925년 전장(鎭江)으로 이주하여 전장 흥사단 지부를 맡았고 미술 공부를 계속하였다. 1926년 흥사단원동위원부(興士團遠東委員部)를 따라 난징(南京)으로 옮겨 화동한국유학생연합회(華東韓國留學生聯合會)에서 활동하였다. 기관잡지 『화동학우(華東學友)』를 창간하고, 창간호 표지 그림을 직접 그렸다.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발생 시 ‘김오연(金吾然)’ 명의로 「진정한 한국민중 전체의 의사」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 배포하여 항일 기운을 진작하였다. 1931년 국내에서 전개된 ‘충무공 유적 보존’를 위한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고, 1930년대에는 정화암(鄭華岩) 등이 주도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연대하여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중국에 사는 손자 김광릉(金廣陵)에 의하면 1942년 8월 28일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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