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준
金陽俊1874 ~ 1910. 1.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6)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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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6) 1874년경 전라북도 용안군(龍安郡, 현 익산시) 일동면(一東面) 당후리(塘後里)에서 출생하였다. 집안 및 성장 과정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짚신 상인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1907년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군자금과 군수품 등을 모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이 일제에 넘어갔으며 내정 또한 통감부에 의해 장악되었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화가 본격화한 것이다. 이를 가속화한 것은 1907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이었다.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하여 광무황제(고종)가 강제퇴위 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는 한편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해산하는 등 국망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인 1907년 현실을 자각하고 의병에 투신하여 김문삼(金文三) 등 7명과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무장한 채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1907년 (음)3월 24일 전북 함열군(咸悅郡) 북이면(北二面) 성당리(聖堂里)의 민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 해 (음)9월 상순 함열읍의 민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음)11월 16일에는 용안군 관아를 공격해 군수 정유섭(丁裕燮)으로부터 징수세 85원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군자금 모집과 함께 일제에 대한 공격도 감행하였다. 용안군 순사주재소를 공격해 이곳에 거주하는 일본인 순사가 가족과 함께 도주하자 순사도(巡査刀) 1자루와 탄약 12발, 현금 12원, 피복 등을 노획하였다.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1910년 1월 1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방화 및 강도죄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옥살이하다가 1910년 1월 30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곽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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