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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신

金成信

186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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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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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벽동(碧潼)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벽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0) 1868년경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 벽동면(碧潼面) 동하동(東下洞)에서 태어났다. 만세 시위 당시 직업은 석공(石工)이었다. 벽동군의 만세 시위는 제일 먼저 벽동면에서 일어났다. 천도교 벽동교구는 천도교 제1세 교조(敎祖)인 최제우(崔濟愚)의 순도(殉道) 기념일인 3월 10일을 맞아 만세 시위를 벌였다. 수백 명의 천도교인이 순도기념식을 끝낸 후, 길거리로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날 기독교인들도 합세하여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이 가세한 시위대는 벽동교회 앞에서 만세 삼창을 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벽동면에서는 다시 3월 30일부터 3일간 잇달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30일에는 2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으나, 일본군이 출동하면서 해산하였다. 3월 31일에는 천도교인 100여 인이 벽동공립보통학교(碧潼公立普通學校) 인근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며 관공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일제 경찰과 군대의 위협 속에서 계속 행진을 벌이던 시위대는 해가 지자 다음 날을 기약하며 자진 해산하였다. 다음 날인 4월 1일의 시위에는 1,000여 명이 나섰다. 이날 시위에 참여하여 행진하였다. 일본군과 경찰이 발포하면서 13명이 사망하였고 25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19년 6월 2일 평양복심법원은 항소를 기각하자 ‘파리평화회의에서 독립 자치를 허용한다고 하여 한민족으로서 한국이 독립될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은 한국인의 의무이지 범죄가 아니다’라고 항변하며 상고하였다.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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