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농
金炳穠1876. 4. 8 ~ 1952. 4.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의주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76년 4월 8일에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참면(站面) 거연관(車輦館) 차련관(車輦館) 유정동(柳亭洞)에서 태어났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순검(巡檢)으로 근무하였다. 1911년에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중국 안동현(安東縣)에 살면서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초순 중국 상하이에서 들어와 평북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독려하던 선우혁(鮮于赫)과 만났다. 2월 15일에 의주군 고령삭면(古寧朔面)에 있는 교회 목사인 이원익(李元益)으로부터 독립 만세 시위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서 2월 28일 이원익으로부터 다음 날인 3월 1일에 의주에서 독립선언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찬성하여 그날 밤 유여대 등과 양실학교 사무실에서 만나 사전 준비에 동참하였다. 유여대는 1919년 3월 1일에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의주면에 있는 동교회(東敎會)의 담임목사였다. 그는 3월 1일 서울에서 열린 독립선포식에 참석하러 가지 않고 의주에 남아 평북 지역 독립 만세 시위 조직에 힘썼다. 3월 1일 오후 2시 양실학교 운동장에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였다. 개회가 선언된 후 단상에 올라 한국 독립의 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이어 유여대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황대벽(黃大闢)이 독립에 관한 연설을 마친 후 군중은 독립 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시작하여 규모가 점점 늘어났다. 시위행진이 끝난 후 유여대를 비롯한 시위 지도부 10여 명이 붙잡혔다. 다음 날인 3월 2일 의주면 칠현(七峴)에 있는 아동여관(亞東旅舘) 김준모(金俊鍵)의 집에서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기독교계 함태영(咸台永)이 보낸 김지환(金智煥)을 만났다. 김지환이 건넨 독립선언서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밀서를 상하이의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임무였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이 항소를 기각하였으나, 상고를 포기하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