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현
金來鉉188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고령삭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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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82년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령삭면(古寧朔面) 북동(北洞)에서 태어났다. 의주군은 평북 북서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삭주군(朔州郡)·구성군(龜城郡), 남쪽으로는 용천군(龍川郡)·철산군(鐵山郡)·선천군(宣川郡),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만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일찍부터 천주교는 물론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인 학교도 다른 지역보다 많았는데 대표적인 학교는 양실학교(養實學校)였다. 이 학교 운동장에서 1919년 3월 1일에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劉如大) 목사를 중심으로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유여대는 의주면에 있는 동교회(東敎會)를 맡고 있었다. 그는 1919년 2월 10일 경 10일경 선천에서 열린 평북 장로회 노회(老會)에서 양전백(梁甸伯) 목사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 명월관에서 열린 3월 1일의 독립선포식에 참석하지 않고 의주에 남아 평북 지역의 독립 만세 시위 조직에 힘썼다. 정명채(鄭明采)·김두칠(金斗七)을 비롯한 20여 명과 함께 양실학교에 모여 서울과 똑같이 3월 1일 오후 2시에 양실학교 운동장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계획을 세웠다. 3월 1일 오후 2시 양실학교 운동장에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였다. 유여대가 개회를 선언하고, 찬송·기도의 순서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유여대를 비롯한 시위 지도부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를 면한 시위 지도부는 다음 날인 3월 2일에 의주면에서 시위 운동을 속개하였는데, 최동오(崔東旿)·최안국(崔安國) 등이 이끄는 천도교인들이 가세하였다. 이날도 30여 명이 검거되었다. 고종(高宗) 인산일(因山日)인 3월 3일에도 의주면에서는 1,200여 명의 시위대가 시내를 돌며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고 관공서로 몰려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4일에는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내 곳곳에서도 시위대가 출몰하였으며, 상점들은 일제히 철시하였다. 양실학교 학생들은 3월 6일 오전 10시에 만세 시위를 재개하였다. 200여 명의 학생이 산에 올라가 대형 태극기를 달고 독립 만세를 부르자, 학교 운동장에서 300여 명의 학생이 호응하며 만세를 부른 후 시가행진을 감행하였다. 의주면의 시위는 3월 27일에도 일어났다. 27일은 장날로 천도교인의 주도로 3,0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대와 일본군이 충돌하면서 시위 지도자 14명이 검거되었다. 독립 만세 시위는 의주군 여러 면으로 확산되어갔다. 3월 30일에는 고령삭면(古寧朔面)에 있는 영산시장(永山市場)에서 3,0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경찰과 헌병이 출동하여 발포하자,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서며 헌병 2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숙소를 파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3명이 즉사하고 여럿이 부상당하였다. 이때 헌병의 총을 탈취하였다가 다음 날인 3월 30일에 붙잡혔다. 신의주지방법원이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하자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은 1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 형을 선고하였다. 재차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1919년 8월 30일 고등법원 형사부가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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