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형
姜齊馨1888. 3. 28 ~ 1926. 10.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의령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3월 28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용덕면(龍德面) 죽전리(竹田里)에서 태어났다. 용덕면 면장으로 1919년 3월 14일 의령면 장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만세 시위는 의령군 동동(東洞)에 사는 구여순(具汝淳)이 계획하였다. 구여순은 이화경(李華卿)과 같이 3월 3일 서울에서 유학하는 여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병문안을 갔을 때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의령으로 돌아오면서 추진되었다. 이화경은 자신의 상점에 보관되어 있던 자루 500여 장을 팔아 시위 자금을 마련하였고 구여순은 동지 규합에 나섰다. 먼저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 정용식(鄭容軾)과 협의한 뒤 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정용식의 병원에서 3월 14일 의령 장날에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일을 맡았다. 면 직원인 전용선(田溶璿)과 최병규(崔秉圭)에게 독립선언서 등사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구여순·최정학은 이러한 도움을 받아 3월 12일 면사무소의 등사판과 종이를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수백 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렸다. 14일 의령 장날 오후 1시 구여순이 “일제의 기반(羈絆)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때는 왔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라고 호소하면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 주도자들이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었고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면서 시위 군중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 군중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경찰서 앞까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3월 15일에도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500여 명의 군중은 “조국의 독립과 2천만의 자유를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남종혁(南宗赫)의 연설을 들은 뒤 경찰서와 군청 앞으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연이은 만세 시위 이후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윤희⋮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