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안삼

金安三

1885 ~ 1920. 10. 2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안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미상만주방면

관련 단체

  • · 대한광복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청산리대첩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920년 순국 당시 34세였으므로 1887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1885년 출생이라는 의견도 있다. 1920년경 북간도(北間島) 허룽현(和龍縣) 사대사(四對社) 서래동(西萊洞)에 거주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북간도 왕칭현(汪淸縣) 따칸즈(大坎子)와 이란거우(依蘭溝) 등에 진영을 구축하고 성립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통신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광복단은 1903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파견되었던 이범윤(李範允)을 단장으로 추대하고, 김성륜(金聖倫)·김성극(金星極)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독립군단(獨立軍團)이다. 설립 당시 이미 60대 중반인 이범윤은 상징적 단장이었고, 중부대판(中部大辦)의 직책을 가진 김성륜과 고문 김성극이 이 군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이들 아래에는 총무·서무·재무·통신·모연부 등이 편성되고 책임자인 부장이 임명되어 각 부서를 이끌었다. 성립 초기 통신부장은 이기준(李基俊)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부원으로 활동하다 시간이 흐른 뒤 부장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단에서 통신부의 역할은 다른 여느 부서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우선 전투를 위해 이동하는 독립군 유격대를 일제 및 중국 군경대(軍警隊)의 감시를 피해가며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야만 하였다. 또한 본부의 통신문이나 지시사항을 지단(支團) 또는 하부기관에 전달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따라서 통신부장은 북간도의 지리에 밝아야만 하였고, 신분이 확실한 통신원을 임명하는 능력이 필요한 자리였다. 대한광복단과 마찬가지로 3·1운동 후 서북간도 여러 지역에 설립된 수십 개의 독립군단은 설립과 동시에 줄기찬 국내 진입전을 전개하였다. 각 군단마다 5~6명 또는 10명 이상의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이들 유격대들은 한국을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일체의 침략기관과 이를 운영하는 일본인 및 친일파들을 파괴하고 처단하였다. 독립군 유격대의 이 같은 활동에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마침내 1920년 8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란 군사계획을 수립하고 그해 10월부터 2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 대병력을 간도를 향해 침입시켰다. 한국에 주둔하는 일제의 조선군(朝鮮軍) 제19·20사단을 남쪽에서, 시베리아파견군을 동쪽에서, 뤼순(旅順)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關東軍)을 서쪽에서, 북만주(北滿洲)파견군을 북쪽에서 이동시켜 서북간도 독립군 기지를 향하도록 했다. 이러한 계획을 사전 입수한 독립군들은 일본군과의 접전을 피하고 일시적으로 병력을 이동하는 피전책(避戰策)을 택하였다. 따라서 독립군단 간에 연락을 취해 백두산의 서쪽 밀림 지역으로 독립군 병력을 이동하기로 하고 8월 하순부터 9월 중순경까지 각자의 근거지를 출발하였다. 북간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들은 백두산의 남쪽으로, 서간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왕칭현의 대한광복단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가 바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다. 백두산 기슭을 향하던 각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은 10월 19~20일경 지린성 허룽현 이도구(二道溝), 삼도구(三道溝)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일본군 육군소장 아즈마(東正彦)가 이끈 아즈마지대가 독립군들을 공격해왔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국민회군(國民會軍)·의군부(義軍府)·한민회(韓民會)·의민단(義民團)·신민단(新民團) 등과 일시적 연합 부대를 형성한 대한광복단은 10월 21일부터 22일까지 이틀간 완로우거우전투(完樓溝戰鬪, 청산리대첩 10여 회 전투 중 2번째로 발생한 전투)에서 다른 독립군단과 연합하여 일본군 약 400명을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후 가족이 걱정되어 허룽현 서래동에 있는 집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 마을을 배일(排日) 한인촌으로 지목한 일본군들이 벌써 들어와 분탕질을 저지르고 있었다. 결국 10월 23일 서래동에서 보병75연대 소속의 일본군들에게 체포되어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