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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택

金信澤

187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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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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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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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통의부
  • · 정의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76년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8월 남만주(南滿洲)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 현 향양(向陽))에서 개최된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에 의해 성립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교섭부감(交涉副監)에 임명되었다. 1920년 10월 서북간도의 독립군 기지와 한인 사회는 약 2만에 이르는 일본군 대병력의 침입을 받아 이듬해 4월까지의 만행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파괴된 독립군 기지와 한인 사회는, 힘을 합해 재건하지 않으면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전쟁 수행은 물론 이주 한인들의 삶도 이어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일본군들이 물러간 뒤, 독립군 지도자들은 단결된 힘으로 기지와 한인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1922년 1월 몇 개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통합된 힘으로는 완전한 재건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 그해 8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17개 단체를 통합해 통의부를 탄생시켰다. 통일회의가 개최된 마권자는 환인현 중심지에서 100여 리 넘게 떨어진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작은 분지의 산골마을이었다. 일본군 침입 당시 많은 독립군 지도자와 독립군들이 피신한 산간 오지였다. 그곳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라고 판단해, 다른 지역에 있던 지도자들까지 마권자로 불러들여 통일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1910년대 초, 서간도 독립군 기지 건설 초반부터 참여했던 김동삼(金東三)이 통의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그 밑에 민사·재무·교섭·법무·학무·교통·실업·군사 등의 부서를 설치해 한인 사회 재건을 위한 자치행정을 이끌도록 하였고, 한인들의 의견을 반영할 의회(議會)도 설립하였다. 그리고 독립전쟁을 수행할 의용군을 따로 편성하였다. 이 같은 조직에서 김영만(金永萬)이 부장인 교섭부의 부감이 된 것이다. 성립 초기에 이런 직책을 맡았다는 것은 통의부에 가담한 17개 단체 중 어느 하나에서 상당한 지도급 인사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보고자료 중 다른 하나에는 성립 초 고동호(高東昊)·김관성(金觀聲) 등 2명과 함께 검무감(檢務監)에 임명되었고, 그 직책의 자격으로 1922년 12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8일까지 개회한 중앙의회(中央議會)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여러 단체가 통합한 성립 초기, 중앙조직의 간부로 임명되었으나 기존단체의 업무를 끝내지 못해 부임을 미루거나 결원이 생겼을 때 일시적 겸임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례로 보인다. 그런데 통의부는 성립 후 얼마 되지 않아 내부 분열이 생겼다. 17개나 되는 많은 단체가 통합에 가담했으므로, 참여 인물 모두의 이념이나 노선이 같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통일회의 당시 참여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이념과 노선을 전부 무시하고 오직 조국을 광복시킨다는 목표 하나로 뭉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조국 광복 후 왕정을 복고시키고자 한 복벽주의(復辟主義)계 인사들과 입법 공화정을 주장하는 공화주의(共和主義)계 인사가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결국 양측은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무력 충돌까지 일으키다가 1923년 초 복벽주의계 인사들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라는 독립군단(獨立軍團)을 성립시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이 나간 뒤, 재조정된 중앙조직에서 검무국장(檢務局長)에 임명되었다. 조직의 내부 및 관할 한인 사회에서 범법자 또는 친일파를 검거해내는 사찰기관의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 직책은 원래 의군부로 빠져나간 복벽주의계의 전덕원(全德元)이 맡았던 자리였다. 복벽주의계 인사들이 빠져 나간 뒤 통의부는 약 1년간 한인 사회를 이끌어 가며 일본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꾸준히 전개하였으나 1923년 후반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서던 의용군 쪽에서 분열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의용군 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온 제1중대장 채찬(蔡燦, 일명 백광운(白狂雲))이 통의부를 떠나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를 만들어 그 기치 하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채찬은 1923년 후반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인사들과 그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리고 남만주로 돌아와, 이듬해 초부터 통의부 의용군 지휘관들과 상의한 뒤 1924년 5, 6월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하였다. 참의부에 참여한 세력은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였다. 독립전쟁을 수행할 의용군의 상당한 세력이 이탈해 나가자 통의부 내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 검무국장에 이어 교통국장에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교통국은 이주한인의 체신(遞信)과 무장 활동을 위해 독립군이 이동할 때 길을 인도하는 업무 및 군사통신 등을 주관하는 부서였다. 한국 내와 만주 각 지역에 점조직으로 파견되어 있는 통의부 통신원들이 교통국 소속이었다. 조직의 내부가 흔들리자 행정부서를 나와 의용군의 직제인 진방대장(陣防隊長)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상설 직책은 아니었다. 참의부 세력이 나가는 과정과 완전히 분리된 후에도 양측은 심각한 대립 기간을 가졌다. 상호 군영(軍營)을 습격하는 무력적 충돌까지 보였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진지를 방어하는 책임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혼란 상태에 빠진 조직을 수습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 같은 직책에 선임된 것은 40대 후반인 나이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연륜과 경험이 있기에 혼돈된 조직을 재정비할 수 있을 것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조직이 분열되어 이탈하자 통의부 지도부는 외부의 지청천(池靑天)·신숙(申肅) 등의 인사들과 남만주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사항을 협의하고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11월 24일, 8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한 정의부(正義府)가 탄생하였다. 정의부에 가담한 단체는 통의부를 비롯해 의성단(義成團)·광정단(光正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고본계(固本稧)·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 및 통의부 성립 시 참여하지 않았던 서로군정서 잔여 세력이다. 정의부는 하얼빈에서 어무현(額穆縣)에 이어 북간도(北間島)까지 선을 그어 그 이남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관할하며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정의부도 통의부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정 및 입법·사법조직까지 갖춘 자치조직과 항일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성립 초기 류허현(柳河縣)에 본부를 설치하고, 행정조직을 책임질 중앙행정위원장에는 이탁(李沰)이 선임되었으며, 의용군 사령관은 군사위원장인 지청천이 겸직하였다. 정의부가 성립하자 의용군 제5중대 3소대장에 임명되었다. 통의부 후반부터 행정조직이 아닌 의용군에 가담해 활동한 것이다. 성립 초기 의용군은 통합에 가담한 단체들의 독립군을 하나로 묶어 완전한 편제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1925년 9월경 400명이 넘는 병력으로 제1중대부터 5중대까지 5개 중대와 헌병대를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의용군은 본부가 있는 류허현과 퉁화(通化)·콴뎬현(寬甸縣) 등에 배치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제5중대 3소대장직을 그만두고 콴뎬현 하루하(下漏河)에 근거지를 둔 헌병대 제1분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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