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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범

金小凡

1890. 4. 10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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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소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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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扶餘)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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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1890년 4월 10일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남면(南面) 삼룡리(三龍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현재(金顯才), 김태현(金泰顯), 김태인(金泰仁), 김소풍(金小風) 등이다. 1915년 부친 김경현 등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였다. 1922년경 남만주(南滿洲)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카이위안(開原)지방 통신원 겸 검무원(檢務員)으로 활동하였다. 통의부는 경신참변(庚申慘變)에 의해 파괴된 남만주의 독립군 기지와 한인 사회를 복원하고자 1922년 8월 성립된 단체였다. 일제는 유격전을 전개해 자신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키려고 1920년 10월부터 약 2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그 근거지인 만주 지역으로 침입시켰다. 이들 일본군들은 이듬해 4월까지, 6개월이 넘는 기간 독립군 군영(軍營)과 이주 한인 사회를 초토화하고, 독립군 및 배일(排日) 한인들을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3,300채가 넘는 한인의 가옥·교회·학교 및 독립군 군영을 파괴 방화하고, 3,700명에 가까운 한인을 총과 칼로 살해하였다. 이처럼 파괴된 한인 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힘을 합해 재건하고 민족의 삶과 항일 무장 활동이 이어지도록 하고자 남만주 17개 단체를 통합해 통의부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통의부는 김동삼(金東三)을 총장으로 한 자치조직과 김창환(金昌煥)을 사령관으로 한 의용군 조직 등 두 방면으로 중앙조직을 구성하였다. 민사·교섭·군사·법무·재무·학무·권업·교통 등의 부서를 둔 자치 조직은 한인 사회의 복구와 부흥을, 5개 중대와 유격대 및 헌병대로 구성된 의용군은 독립전쟁을 담당할 조직이었다. 이 중앙조직 이외 남만주에 산재한 한인 사회에는 규모에 따라 약 1,000호(戶)를 관할하는 총관(總管)과 100호 또는 200호를 한 구성체로 한 지역에는 구(區)를 설치하는 지방조직을 만들었다. 펑톈(奉天, 현 瀋陽) 북쪽에 위치한 카이위안현에는 구가 설치되었다. 구에는 구장(區長) 밑에 서기, 검무원, 통신원 등의 조직원들이 임명되어 행정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들 직책에는 일반적으로 1~2명의 인원이 구성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적임자가 없을 경우에는 두 업무를 한 사람이 맡기도 하였다. 카이위안현의 경우도 통신과 검무의 업무를 혼자 담당한 경우에 해당한다. 통신원은 유격 작전을 위해 출동하는 독립군들을 안내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이전 지역 통신원이 유격대원들을 안내해 오면, 인계받은 대원들을 다시 목적지를 향한 다음 지역까지 안전하게 안내하는 것이었다. 또 중앙에서 내려온 공문(公文)이나 전달 사항을 받은 후, 이를 지정된 다른 지역으로 연결하는 업무도 수행하였다. 검무원은 관할 한인 사회에 거주하는 한인들로부터 의무금이나 의연금 등을 징수해 중앙조직에 보내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이었다. 한인사회 각 호를 돌며 금전을 받아내는 업무이기에 모두에게 신임을 받는 인물이 맡아야 하는 직책이었다. 통신원은 주변 지리에 밝아야 가능한 일이었고, 검무원은 담당한 지역의 거주자들과 잘 소통할 수 있어야 하였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15년 만주로 건너와 지리에 밝고, 많은 동포와 어울려 지냈기에 두 직책을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업무를 1924년 (음)7월경까지 수행하였다. (음)7월이면 양력 8~9월에 해당된다. 이 시기 통의부는 남만주 지역의 다른 7개 독립운동 단체와 통합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운동의 결과, 통의부를 비롯해 8개 단체가 통합해 그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의부에 참여하지 않고, 이후부터 하이룽현(海龍縣) 도목구(倒木溝)에서 부친과 함께 정미소를 운영하였다. 그런데 1925년 6월 일제는 중국을 압박해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검거하고 탄압하려고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을 맺었다. 이 협정 후 중국과 일본 양측 군경(軍警)은 만주 지역에서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군 및 배일(排日)한인을 탄압하였다. 결국 1928년 12월 20일 도목구의 정미소에서 일제 영사관 경찰대에 체포되었다. 1929년 1월 1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그해 2월 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의 옥고를 겪은 뒤, 1931년 2월 8일 출소하였다. 출소 후 다시 도목구로 건너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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