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강종근

姜琮根

1901. 9. 20 ~ 1942. 6. 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강종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남 강서(江西)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국장(200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3) 1901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한국감리교인물사전DB」에는 1904년 9월 26일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에는 일제 경찰에 붙잡힐 당시 본적지는 경성부(京城府) 홍파정(紅把町), 주소지는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철원읍(鐵原邑) 관전리(官田里)로 되어 있다. 이명은 송본종근(宋本琮根)이다.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2세 때 부친을 여의고 10세 때 모친과 형을 따라 중국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구산쯔(孤山子)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16세 때 기독교 장로회 계통의 삼광고등학교(三光高等學校)에 입학하여 2년 후 졸업하였으며, 19세 때 톄링(鐵嶺)의 만철(滿鐵,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계통에서 경영하던 육영학교(育英學校)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하여 21세에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로 와서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學院), 배재학당(培材學堂) 등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25세 때인 1927년 4월 기독교 감리교 계통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하였다. 이후 이화보육학교(梨花保育學校),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등에서 사무원으로 일하였다. 1937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경기 연천군(漣川郡) 연천면(漣川面)에 있는 기독교 조선감리교 계통의 연천교회(漣川敎會)에서 근무하였다. 1938년 5월 목사가 되어 강원 김화군(金化郡) 창도면(昌道面)에 있는 조선감리교 계통의 창도교회(昌道敎會)로 옮겼다. 1939년 5월 3일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철원교회(鐵原敎會)로 옮겨 시무하였다. 만주 톄링의 육영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그 지역 기독교 감리교 계통의 이동교회(裡洞敎會) 목사 최학기(崔學基)로부터 민족적인 감화를 받아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서울로 돌아와 신학교에 다닐 때 협성신학교의 민족주의적 교풍에도 크게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이 더욱 치열해졌다. 이후 목회(牧會) 활동을 하면서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각 교회의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설교를 계속하다가 결국 일제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으니 설교의 대략은 아래와 같다. 연천교회에서 근무하던 1937년 2월 이래 신도 50~60명에게 ‘바울의 위대한 걱정’, ‘손을 펴라’ 등의 제목으로 한국 동포의 구원과 독립에 대해 설교하였다. 창도교회에서 근무하던 1938년에도 신도 40~50명에게 민족의 단결과 민족의 행복을 위한 인재의 양성을 호소하는 내용의 설교를 하였다. 또한, 그해 10월 창도교회 내 창도자모회(昌道姉母會) 회원들에게도 “조선이 멸망한 것은 우리 조선이 무학무능(無學無能)한 때문이므로 귀녀(貴女)들은 자제의 교육에 노력하여 조선 유지의 인재 양성에 노력하라”고 설교하였다. 1939년 1월 19일에는 창도교회 신도 약 50명에게 ‘종교와 귀농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만주 등지로 흩어진 한국인을 유태인의 이산(離散)에 비유하면서 농업국인 한국의 삼천리강산에 씨를 뿌리자는 내용으로 설교하였으며, 그해 4월 16일에도 ‘부활절을 바라며’라는 제목으로 한국 사회의 생기를 진작시킬 것에 대해 설교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에 의거한 감시 대상이 되었고, 1940년경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미결통산 90일) 형을 선고받았으며, 함께 재판을 받은 신도 양산재만(陽山在萬)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만기 출옥 일이 1943년 1월 19일이었으나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일제의 고문으로 신병이 악화되어 1942년 6월 3일 사망하였다. 당시 서대문형무소 측의 연락을 받은 부인 윤희성에게 신병이 인도되어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순국하고 말았다. 이후 기독교 장로가 된 부인 윤희성은 서울 아현동에 신성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