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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화

金聖化

미상 ~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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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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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楊平)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양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전기의병 김백선 의병 부대
  • · 호좌의진
  • · 원주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2001)

관련 사건

  • · 장회협 전투
  • · 충주 가흥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1)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지평(砥平, 현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났을 때 지평 포군의 영수 김백선(金伯善)을 따라 의병 운동에 투신하였다. 김백선은 이춘영(李春永), 원주(原州)의 김사정(金思鼎) 등과 의병 봉기를 모의하였다. 그 결과 1896년 1월 12일 원주 안창(安昌)에서 지평 포군과 원주 민인(民人)을 중심으로 의병 봉기를 하였는데, 지평 포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봉기 직후 의병부대는 원주 관아로 진격하여 점령한 후 제천 지역 인사들의 의병 참여와 일본군 및 중앙군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제천에서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여 의병장에 이필희, 중군장에 이춘영, 군무도유사에 안승우, 선봉장에 김백선 등이 임명되었다. 이때 김백선 휘하의 선봉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제천에서 재편된 의병부대는 이필희(李弼熙) 의병장 명의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통하고, 1월 19일 원주에서 올 추가 병력을 기다리면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단양으로 이동하였다. 관군은 1월 21일 청풍의 서창(西倉) 방면에서 들어와 22일 새벽 장회촌 방면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관군이 장회촌 방면에서 진격해 오자 이춘영의 지휘 아래 장회협(현 제천시 수산면에서 동쪽의 단양군 장회 쪽으로 통하는 37번 국도 부근)에서 매복하였다. 관군 50~60명이 골짜기로 들어오자 매복한 상태에서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둔 이 장회협 전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장회협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원주에서 추가 병력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한 지평 포군들의 불만이 증폭되어 의병부대가 분열되자 이춘영을 따라 순흥·영주·영춘·영월로 이동하였다. 영월에서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수습하고 호좌 의병부대를 출범할 때 참여하였다. 이때도 선봉장 김백선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영월에서 출범한 호좌 의병부대가 제천으로 이동할 때 김백선의 지휘에 따라 앞장서 진격해 들어가 2월 11일 새벽 제천 북면에 도착하여 본진이 제천 입성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또 제천에 입성한 호좌 의병부대가 관찰부였던 충주성을 점령하고자 공격해 들어갈 때도 선봉에서 활동하였다. 호좌 의병부대가 충주성을 에워싸고 공격해 들어갈 때 충주성에 있던 일본군이 북쪽 누각에서 사격하자 잠시 주춤하고 진격하지 못하자 이춘영·김백선의 지휘 아래 공격해 들어가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충주성 점령 직후에는 가흥 방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충주관찰사 김규식의 요청을 받은 일본군은 2월 18일 밤 남산 사직당 소나무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아침이 되자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을 의지해 일본군이 가까이 오도록 기다렸다가 사격하는 전술로 막아냈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앞잡이였던 순검, 순포 등을 잡아 처단하고 삭발한 자 40~50명을 체포하였다. 이후 김백선을 따라 충주성을 떠나 지평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2월 23일 가흥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달천을 넘어 공격해 들어오자 중군장 이춘영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 물리쳤다. 이어 가흥 방면으로 패주하는 일본군을 쫓아 다락바우(충주 가금면 누암리)를 지나 안반천까지 추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병력을 돌이켜 회군하다가 수안보에 주둔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춘영이 전사하였다. 또 3월 2일 가흥 방면에서 일본군이 공격해 들어와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던 중 주용규(朱庸奎)가 전사하였다. 이처럼 호좌 의병부대의 중추적인 인물들이 전사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을 때 김백선과 함께 다시 충주성으로 돌아와 호좌 의병부대의 사기를 높였다. 그러나 일본군도 병력이 증강되어 일본군 수비대 3개 중대가 충주성을 공격해 들어왔다. 결국 3월 5일 충주성을 나와 청풍으로 퇴각하였다. 3월 8일 제천으로 복귀한 호좌 의병부대는 의병부대를 재정비한 후 공세적 방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즉, 일본군의 병참이 있는 가흥과 수안보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중 가흥 공격에 참여하였다. 가흥 공격에는 김백선의 선봉 부대, 후군, 좌군, 우군이 출정하였다. 김백선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3월 15일 제천에서 출발하였다. 3월 18일 하소나루를 건너 가흥 남쪽의 산인 작미산(작미산)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군이 강을 건너서 가흥 맞은편의 청룡촌(가흥 건너편의 중청리(中靑里) 남쪽 마을)으로 들어오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 부대가 일본군을 쫓아 강을 건너 봉황내 쪽 산으로부터 공격하고, 후군은 강 건너인 목계 부근의 산에 의지하여 두 방향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매복한 상태에서 이동하지 않았다. 이는 원주 쪽에서 가흥으로 직행한 한동직 의병부대와 좌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이 전투에서 의병은 1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의병부대 간 통일된 지휘 체계가 존재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였다. 이후 김백선의 선봉 부대가 독자적으로 가흥을 공격하고자 중군장 안승우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지원 병력 없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김백선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손덕화(孫德化), 김정순(金正淳)과 함께 전사하였다. 중군장 안승우는 4월 26일(음 3월 14일) 제천의 남쪽 남당촌에서 의병을 집결시키고 이들 지평의병 3인의 장례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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