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련
金聖鍊1870. 7. 16 ~ 1942. 1.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좌의진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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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0년 7월 16일 평안남도 개천군(价川郡) 중서면(中西面) 용흥리(龍興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부친은 김규헌(金奎憲)이다. 자는 중희(中希), 호는 강암(强菴)이다. 1895년 26세 되던 해에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강학에 참석하여 문인이 되면서 그와 함께 활동하였다. 19세기 조선 사회의 보수적인 유생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척사위정’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 논의들은 1860년대에 일어난 두 차례의 ‘양요’,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운동, 1881년 『조선책략』과 개화파의 개혁 사업을 반대하는 상소 운동 등을 거치면서 확립되었다. 이러한 여론을 주도하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체계화한 사람 중 한명이 유인석이었다. 유인석(柳麟錫)은 14세 부터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아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이항로가 별세하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종숙인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화서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는데, 면암 최익현(崔益鉉)·유중교(柳重敎)·김평묵(金平黙)··유인석 등이 그 정신을 이어 받은 당대의 석학들이었고, 이를 실천에 옮긴이가 의암 유인석이었다. 보수 유생층의 현실 인식은 기본적으로 화이관에 입각하여 형성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소중화의 전통을 지키고, 소중화를 실현하는 기구로서 국권 회복을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는 ‘대변화’를 당하게 되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유생층이 선도하는 의병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생층이 제시하던 가장 기본적인 대응책은 ‘내수외양론’이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는 길은 근본적으로 국내의 정치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유인석은 단발령이 실시되자 ‘처변삼사’를 결정하였는데, 의병을 일으켜 국내외의 적들을 없앤다는 ‘거의소청(擧義掃淸)’, 더럽혀진 땅을 떠나서 옛 법을 지킨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죽음으로써 자기의 뜻을 지킨다는 ‘치명수지(致命遂志)’가 그것이었다. 1895년 당시 유인석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필희·서상렬·이춘영·안승우 등의 의병진에 격려의 글만 보냈다. 그러나 제천을 중심으로 대규모 의병부대가 구성되자 내부적 단결을 굳건히 하고 또 광범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지도체제가 요구되자 유인석은 상중에도 불구하고 1896년 2월 7일 영월에서 의병장에 올랐다. 1896년 의병의 실패 후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해산과 고종 퇴위 등의 상황을 맞아 전국적인 의병 항쟁이 일어났지만 유인석은 병으로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대신 거의를 점진적으로 준비하고자 하는 이른바 “지구전을 위한 근거지 건설”을 구상하였다. 이를 위해서 연해주, 간도 등 국외에서의 무력 항쟁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전개한 유인석의 문인이 되어 의병에 동참하였는데, 유인석은 그의 족조인 죽당(竹堂) 김내현(金來顯)의 묘갈명을 쓰면서 그를 일러 “바탕이 아름답고 품행이 단정함을 좋아하여 사우들에게 훌륭한 명성을 얻고 있다”라고 평하였다. 간도로 건너가는 유인석을 끝까지 수행하였으며, 1900년 김두운(金斗運)·김정업(金鼎業)과 함께 개천·안주·박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고, 전답 1만 5,000여 평을 매각하여 의병의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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