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운
金成雲미상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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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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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생몰년은 미상이나 1907년 당시 45세였으므로 1863년생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수비면(首比面) 심천동(深川洞) 출신이다.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되면서 의병 항쟁은 범국민적 전쟁으로 고조되어 갔다. 1907년 9월 경북 순흥(順興) 출신 권석규(權錫奎) 등과 함께 출신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심천 출신인 장문실(張文實)·류건배(柳健倍) 등과 함께 영양 지역 남북을 오르내리며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영양 지역의 금전(金錢)·곡식(穀食) 및 기타 물품 징발명령서를 만들어 영양군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같은 달 권석규 등 20여 명과 함께 총검으로 무장하고 수비동 금(琴) 약국에 들어가서 의병임을 밝히고 군수품 명목으로 목면 8필을 징발하였다. 또 같은 달 계동(桂洞) 황교리(黃校理)에게는 벼 3석을, 문암동(門岩洞)에 들어가서 그곳 동장으로부터 쌀 3석과 엽전 30냥을 징수하였다. 같은 해 12월 25일 영양군 북초면(北初面) 개상(開上)·개중(開中)·개하(開下) 곧 현재의 일월면 가천(佳川)·송하(松下) 마을에 들어가 군자금 30관문(貫文)을 징수하였다. 12월 말 영해 의병부대 신돌석(申乭石)이 영양군 수비면으로 들어오자 이와 제휴하여 일월산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 1908년 2월경 일월산(日月山)을 거점으로 서로 연계하여 활동하고 있던 신돌석 의병부대·류시연(柳時淵) 의병부대와 함께 그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이 가장 경계하던 의병부대였다. 당시 경북 영천(榮川, 현 영주시) 경찰분서장 경부(警部) 스즈키鈴木兵作는 통감부 경무국장(警務局長) 마쓰이(松井茂)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봉화군 일월산 동남 지방과 영양군 수비와 죽치리(竹峙里) 부근에 신돌석·김성운이 이끄는 약 200여 명의 비도(의병에 대한 일본측 표현)가 출몰하고, 또 동군 일월산 남방 태두(太頭)와 사곡(寺谷) 부근에 류시연이 이끄는 100여 명의 비도가 배회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 순사대는 이들 의병부대를 주목하여 1908년 2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들 부대는 일월산을 중심으로 봉화(奉化)·안동(安東)·청송(靑松)·영덕(盈德)·울진(蔚珍) 등 여러 곳을 왕래하며 유격전으로 일본 순사들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6종대(縱隊)로 구성된 일본 순사대의 지속적인 작전으로 타격을 받으면서 신돌석은 영해(寧海) 방면으로, 류시연은 안동(安東)과 영양(英陽) 방면으로 물러났다. 당시 수하에는 30~60명의 의병이 따르고 있었다. 1908년 2월 18일 영양군 수비면 신지(信地)와 무곡(無谷) 지역에 머무르던 중, 2월 19일 오전 5시경 영천경찰분서에서 파견한 츠네토(常藤) 종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여기서 장남수(張南守) 등 병사 1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또 같은 날 수비면 대곡동(大谷洞)에서 또 다른 순사대의 급습을 받고 약 30명의 병사 중 9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계속되는 순사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채 수비면 부근을 전전하였다. 의병 40~50명을 이끌고 내장동(內獐洞) 방향 일월산 부근에 잠복했다가 수비면 신천(新川) 지역으로 이동하여 순사대의 정탐을 피하였다. 그 뒤 일대(一隊)는 총기를 숨기고 수비면 마을에 잠복했고, 다른 부대는 화랑동(花郞洞)과 용수동(龍水洞) 골짜기로 피신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해(平海)·울진 방면으로 물러나 종적을 감추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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