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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택

金聖澤

1898. 3. 1 ~ 194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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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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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안주(安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안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청년단연합회
  • · 광복군총영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자성군수
  • · 장연군수 처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98년 3월 1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안주면(安州面) 율산리(栗山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인성(金仁成)이다. 안주의 예수교에서 경영하는 유신학교(維新學校)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고등과에 입학해 4학년까지 다니다 중퇴하였다. 기독교에서 설립한 학교에 다닌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1919년 2월 중국 상하이(上海)의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간부 선우혁(鮮于爀)이 평안도로 왔다. 선우혁은 기독교계 지도자인 양전백(梁甸伯)·길선주(吉善宙)·이승훈(李昇薰)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려고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국내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의를 고조시킬 것을 당부하였다. 선우혁의 이 같은 당부로 평안도 지역은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민족지도자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이 소식을 접하자, 시위를 준비하고 서울과 때를 맞추어 3월 1일 안주 군민들을 모아 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다음 날에도 군민들을 이끌고 안주 읍내를 돌며 만세 시위를 벌이던 중, 이를 저지하려는 헌병대와 격투를 벌이다 머리에 상처를 입자 몸을 피하였다. 함경남도 혜산진(惠山鎭)까지 피신하였다가 (음)8월경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체포대상이었으므로 10월 27일 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丹東))으로 갔다. 이어 서간도의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고자 류허현(柳河縣)까지 갔으나, 졸업생 배출 후 생도를 모집하지 않는 바람에 다시 안둥현 인접 지역인 콴뎬현(寬甸縣)으로 갔다. 이곳에서 오동진(吳東振)을 만나 그의 권유로 의용대에 가입하였다. 의용대는 오동진이 3·1운동 직후 만주로 건너와 처음 조직한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뜻하는 것이다. 광제청년단을 기반으로 하여 오동진과 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 등이 국내외의 청년단을 연합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조직하자 대원이 되었다. 1920년 초 오동진은 이탁(李鐸)과 힘을 합해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콴뎬현을 기반으로 참리부(參理部)·사령부·군영(軍營)을 갖춘 광복군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이들 조직 밑에 보다 활동적이고 효율적인 무장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하였다. 이에 다시 광복군총영 대원이 되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서의 의열 투쟁을 계획하였다. 미국 의원단 방한시 대도시에서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일제의 수괴와 친일 주구들을 처단하여 일제의 한국 지배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의열 투쟁을 위해 광복군총영을 3개의 결사대로 나누어 서울·평양·선천·신의주 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다. 이때 김영철(金榮哲)을 대장으로 하는 제1대 결사대로 뽑혀 김최명(金最明) 등과 서울로 파견되었다. 폭탄 3개, 권총 3정, 탄환 150발, 경고문 등을 지닌 채 (음)5월 28일 총영장 오동진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을 건너 오동진의 고향집이 있는 의주군 청수동(靑水洞)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이튿날 오동진은 본부로 돌아가고, 결사대는 대장 김영철의 고향 영변(寧邊)으로 갔다. 그곳에서 삼베 80필을 구입하여 몸에 지닐 약간의 총알과 권총을 뺀 폭탄과 총알을 포장하였다. 이것을 김영철의 지인 김용규(金龍奎)에게 우편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하고 일행은 서울로 출발하였다. 서울로 가는 도중 친일분자이면서 군민들을 혹독하게 착취하는 평안북도 자성군수와 황해도 장연군수를 처단하였다. 이후 결사대는 각자 흩어져 서울로 향하였다. 7월 중순 서울에 모인 결사대는 운송점에서 폭탄을 찾아 종로구 청진동에 사는 지인 유용갑(劉龍甲)의 집에 맡겼다. 결사대원 3인은 8월 22일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에 있는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에 모여 최종 작전회의를 가졌다. 회의 결과 폭탄 1개는 대장 김영철이 매국적 이완용(李完用)의 집에, 1개는 김최명이 종로경찰서에, 나머지 하나는 그가 남대문역에 투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들을 줄곧 감시하던 일제 경찰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 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다. 옥고 중 3년을 감형받아 1927년 9월 21일 두 동지와 함께 출옥하였다. 3·1운동 당시부터 고향에서 영웅이 된 그가 출소하자 안주살수청년회(安州薩水靑年會)는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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