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성일

金成一

1897. 4. 14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성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북 용천(龍川)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용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보합단(大韓獨立普合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5) 1897년 4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읍동면(邑東面) 사악동(沙岳洞)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20년 용천에서 대한독립보합단(大韓獨立普合團, 약칭 보합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8월경 김시황(金時晃)·김동식(金東植)·백운기(白雲起)·김중량(金仲亮)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보합단을 결성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보합단은 원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김동식(金東植)이 1920년 3월 국내로 돌아와 백운기 등과 함께 결성한 대조선청년결사대(大朝鮮靑年決死隊)를 확대시킨 조직이다. 단원이 500여 명에 달하였으며, 단장은 김시황, 총무는 김동식, 재무는 백운기, 선전은 김도원(金道源)이 맡았다. 평북 의주군(義州郡) 내에 있는 동암산(東巖山)을 근거지로 활동하였으며, 한국 각지의 부호(富戶)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고 암살대(暗殺隊)를 조직하여 일본인 군인과 경찰, 친일 밀정(密偵) 및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고 식민통치 기관을 습격하는 등 무장 투쟁을 집중적으로 벌였다. 1920년 10월 26일경 박운죽(朴雲竹)의 집에서 박운죽의 권유로 보합단에 가입하였다. 이틀 뒤인 10월 28일경 박운죽으로부터 각 관청 등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폭탄 2개와 군자금 모집 영수증 용지, 경고문 등이 담긴 양말을 건네받아 이를 보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폭탄 2개를 자택 거름더미 속에 묻어두고 문서들은 지붕 위에 숨겨두었다. 이후 폭탄 2개는 박운죽과 그의 형 박운석(朴雲碩)에게 넘겨져 용천군 외상면(外上面) 남시동(南市洞) 공립보통학교 앞에 있는 송림(松林) 한가운데 묻어두었다. 이러한 일이 발각되어 박운석·김유성(金有成)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또한 보합단원들의 동암산 근거지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자, 선천군(宣川郡) 산면(山面)으로 이동 중이던 1920년 10월 2일 산면 보곡사(普谷寺) 뒷산에서 추적해온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교전(交戰)한 끝에 단원 3명이 피살되고 다수가 붙잡혀 각종 서류들을 빼앗기면서 세간에 드러나게 되었다. 검거를 피한 단원들은 근거지를 서간도의 콴뎬현(寬甸縣)으로 옮기고 조직을 재편한 뒤, 11월 중순경에는 국내에서 이종영(李鍾英) 등이 조직한 무장단체와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1920년 12월 초 서울 운니동(雲泥洞)에서 밀정의 밀고로 다시 조직이 발각되었다.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 순사 이정선(李廷善)의 사살 등을 계기로 이종영·김도원 등 20여 명이 붙잡히면서 조직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이듬해인 1921년 초까지 전국 각지에서 보합단원에 대한 검거 선풍은 계속되었다. 1921년 4월 25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폭발물단속령’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동지들과 함께 즉시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그해 6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23년 2월 7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