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성항

金成恒

1880. 10. 24 ~ 1921. 1. 18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성항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남 평양(平壤)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1)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1) 1880년 10월 24일 평안남도 평양군(平壤郡) 고평면(古平面) 상단리(上端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서흥군 도면(道面) 두의리(杜義里)에 거주하면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황해도 중동부에 위치한 서흥군은 동쪽은 수안군·신계군, 서쪽은 황주군·봉산군, 남쪽은 평산군, 북쪽은 평안남도 중화군과 접하고 있다. 서흥군에 독립선언서와 만세 시위에 관한 연락이 온 것은 1919년 3월 1일이다. 3월 2일에는 평양으로부터 매양면(梅陽面) 면사무소에 ‘지금 평양에서는 확실히 독립을 선언한다. 대한국 민족은 이때에 당하여 일층 분려하라’라는 내용의 우편물이 도착하였다. 이날 율리면(栗里面) 서달리(徐達里)에 사는 김명려(金明麗)는 서흥 천도대교구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해주 천도교구실에 전달하였다. 다음 날인 3월 3일에는 매양면 덕암리(德岩里)에 사는 기독교인 홍종훈(洪鍾勳) 등이 주도하여 덕암리교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서흥군에서 본격적인 만세 시위는 3월 10일 도면(道面) 능리(陵里)에서 시작되었다. 3월 초 평양에 가서 윤종식(尹宗植)에게 독립선언서 10여 매를 받아와 교회에 전달하고, 박이도(朴履道)·원용목(元用睦)과 교사 원용팔(元用八) 등과 모의하여 3월 10일 능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이 사실이 3월 9일 헌병대에 발각되면서 오후 6시에 원용팔·원용목 등과 함께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결국 3월 10일 오전 8시에 교회에서 하기로 한 시위는 불발되고 말았다. 박이도마저 능리로 가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김두순(金斗淳)과 김종철(金宗喆) 등이 도면 송화리(松花里) 서당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 독립 선언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들과 함께 능리로 행진하였다. 동시에 송화리에서 출발한 민응식(閔應植)과 김좌용(金佐用) 등이 이끄는 시위대는 능리로 나가면서 도면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소사면(所沙面) 방곡리(防谷里)의 서당 교사 원광흠(元光欽) 역시 학생과 함께 능리로 향하였다. 오후 4시경에는 구성빈(具聖彬)·김두익(金斗益)·김원보(金元甫)·유기호(劉基鎬)·유병관(劉秉寬)·정학주(鄭學柱) 등이 능리시장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벌이자 시장에 나왔던 주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 대열이 200여 명을 넘어섰다. 경찰과 헌병이 나서면서 시위대는 해산당하였고 구성빈과 김두익을 비롯한 주도자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다. 1919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으로부터 항소가 기각되자 상고하였으나,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1921년 1월 10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8일 만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