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기
金聖基1877 ~ 1908. 6. 1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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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5) 1877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출신지는 미상이다. 황해도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병탄당하는 한편, 1907년 6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7월 19일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 속칭 정미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행정권을 일제에 병탄당하였고, 일본 통감이 내정을 감독하게 되었다. 나아가 협약의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를 통해, 일본인이 대한제국 사법 관리에 임용되게 되었으며, 징병제에 의한 정예군을 양성한다는 미명 하에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1905년 일제가 군제 개혁을 빌미로 황제 직속의 군 지휘 관청인 원수부(元帥府)를 폐지하여 이미 그 규모가 반으로 축소된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친위대(親衛隊)와 시위대(侍衛隊)를 시작으로 9월 3일 함경남도 북청(北菁) 진위대(鎭衛隊)까지 해산령이 하달되어, 공식적으로 해산되기에 이른다. 나아가 일제는 1907년 9월 총포 및 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였고, 기존에 소지한 총포류는 반납할 것을 천명하였다. 대한제국 군인들과 산악 지역의 산포수들은 이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으로 분기하였다. 고종의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및 군대 해산으로 인해 궐기한 이들을 가리켜 정미의병, 혹은 후기 의병이라 부른다. 이전의 의병이 주로 비전투원의 결집에 의한 비정규군의 성격이었다면, 이 시기의 의병은 군인과 포수의 참여로 인해 군사기술이 전문화되는 경향을 띠었고, 지휘체계 또한 대한제국 군제와 유사한 형태로 운용되었다. 또한 의병부대 간의 연합작전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장기 항전을 위한 거점과 군자금 및 군량미를 수급할 기반 마련에 힘썼다. 이에 일제는 의병 탄압에 나섰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 창설된 이래,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이전에 일제는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도합 4차에 걸친 여단급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에 따라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 황해도 지역은 을미의병 이래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유림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이때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장연군(長淵郡)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1일 송화경찰분서 소속 일본 순사에 의해 피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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