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
金善日1880 ~ 19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산남 의진(산남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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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80년생으로 추정되며,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내상면(內廂面) 남외동리(南外洞, 현 울산광역시 중구 남외동(南外洞)) 출신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6년 경상북도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를 대장으로 하는 산남 의병부대가 결성되자 이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산남 의병부대는 1906년 3월 고종의 시종관(侍從官)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은 아들 정용기가 영천군 자양면(紫陽面) 검단리(檢丹里, 현 자양면 충효동(忠孝洞))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함께 일으킨 의병부대로 당시 영덕(盈德) 지방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함께 영남 지역을 대표하였다. 1907년 산남 의병부대는 여러 부대로 나누어 관동(關東) 지방으로 북상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먼저 영해(寧海) 방면으로 북상하던 중 그해 10월 8일 영일군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巖)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지도부가 전사하였다. 이에 정환직이 남은 병사들을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정환직 의병부대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탄약도 떨어지고 추위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정환직은 개별적으로 무기와 탄약 및 복장을 구해서 강원도 오대산으로 모일 것을 명령하고 부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형성하고 일제 침략기구 공격과 친일 세력 처단 및 군기(軍器)와 군자금 확보에 나섰다. 1907년 11월 16일 2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북 흥해읍(興海邑) 순사분파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 곤조(權次)와 한국인 순사 정영필(鄭永弼)을 처단하고 군기를 징발한 뒤 분파소를 불태웠다. 이어서 이석이(李石伊)와 함께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1908년 1월 3일 경북 장기군(長鬐郡) 읍내 순사분파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 모리(森)를 총살하고, 고사키(光崎)에게는 총상을 입혔다. 여기서도 총과 칼 및 탄환 등을 징수한 뒤 분파소와 재무서를 불태웠다. 그해 7월 상순경 다시 의병 10여 명을 이끌고 경북 흥해군 기계면(杞溪面) 탱동(撑洞)에 사는 김석희(金錫熙)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40원을 징수하였고, 7월 9일에는 의병 7명을 이끌고 기계면 관암동(冠岩洞)에 들어가 이 마을의 장공원(張公圓)·장공달(張公達)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집을 불태웠다. 이러한 사실로 일제 경찰에 잡혀 1909년 10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 살인, 방화 죄목으로 동료 의병 이석이와 함께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0년 3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 후 교수형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나이 31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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