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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이

金仙伊

미상 ~ 1896.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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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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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의병

관련 단체

  • · 서상렬 의진(서상렬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정확한 출생일과 출생지는 알 수 없다. 서상렬(徐相烈)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기·충청·강원도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사망하였다. 서상렬은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의 11세손으로 아호는 경암(敬庵)이고 자는 경은(敬殷)이다. 위정척사운동은 1866년 병인양요를 전후하여 서양 세력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지방 유생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등이 상소를 통하여 서양의 침투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항로·기정진의 위정척사운동은 이후 화서학파·노사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이 학파를 중심으로 조선 말 민족운동의 전형적 형태인 의병 투쟁을 일으킨 의병 지도자가 출현하였다. 서상렬은 1884년 5월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화서학파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1895년 5월 장담 건너편 구탁마을에 자리 잡자 서상렬은 주용규(朱庸奎)와 함께 사방에서 모여드는 선비들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1895년 말 단발령 이후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내세우고 군사 서상렬, 군무도유사 안승우(安承禹), 중군장 이춘영(李春永),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참모 이필근(李弼根), 서기 원용정(元容正) 등으로 ‘제천 의병부대’가 성립되었다. 1896년 2월 7일 영월에서 유인석이 의병장에 올랐다.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장담의 선비들이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호좌 의병부대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유인석은 의병부대의 편제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당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申芝秀), 좌군장에 원규상(元奎常), 우군장에 안성해(安成海), 선봉장에 김백선, 소모장에 서상렬, 우익장에 윤성호(尹聖鎬), 좌익장에 우필규(禹個圭), 진동장에 이필희, 복의장에 이완하(李完夏), 운량감에 이필근이 활약하였다. 호좌 의병부대가 다시 제천을 장악한 것은 1896년 2월 11일이었다. 호좌 의병부대는 단숨에 충주성을 장악하고 서상렬은 영남 의병진과 공조하려고 영남으로 향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영월 등 관동 지역에서 소모 활동을 벌이고 있던 서상렬에게 ‘소모토적대장’의 직책을 주어 원용정·홍선표 등 장담 선비들과 함께 ‘소토진’을 이끌고 영남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하지만 영남의 여러 의병부대를 묶으려던 서상렬의 노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그가 추진하던 여러 의병부대의 공동 투쟁은 결국 이뤄지지 못하였다. 서상렬은 (음)5월 23일 정선에 머물던 대진으로 복귀하였다. 그동안 호좌 의병부대는 청풍·충주·음성·원주·제천·영월·평창·인근 지역을 전전하면서 중군장을 세 번이나 교체할 만큼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호좌 의병부대는 서상렬이 복귀하자 서북 지방으로 이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서상렬의 소토진은 대진에 앞장서서 서행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음)6월 13일 낭천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아 서상렬이 전사하였다. 그는 1896년 6월 12일 사망하였다. 한편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의병장 서상렬을 보좌하다 함께 순절하였다. 서상렬의 시신과 함께 현지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석 달 후에 채국보(蔡國輔)가 제천으로 반장하여 장담 마을 건너편 구곡리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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