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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복

金錫復

1872 ~ 1909.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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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석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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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관련 사건

  • · 정미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6) 1872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출신지는 알 수 없다. 1909년 무렵 경기도 영평(永平, 현 포천군 영중면)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의거를 빌미로 일제는 7~8월에 걸쳐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들 일련의 침략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 전면전과 다름없는 격렬한 항일전이 벌어졌다. 후기의병이라 불리는 정미의병이 그것이다. 특히 군대해산은 의병 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 고조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서울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로 비롯된 군인들의 저항은 원주·여주·강화·진주·평양 등 전국으로 파급되어갔다. 해산을 거부한 이들은 그대로 의병으로 전환됨으로써 의병 전쟁에 강력한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해산군인들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거나 기존의 부대에 흡수됨으로써 이후 의병은 무기와 전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전국 각지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다. 경기 지방에서 의병 전쟁이 본격화된 시기는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였다. 군대해산을 반대하는 지방 진위대 군인들의 반일 봉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8월 9일 진위대 제1대대 강화분견대에서 하사 유명규(劉明奎), 연기우(延基羽),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 등이 주도하여 봉기하였다. 일제의 즉각적인 탄압을 피해 경기·황해 지역으로 빠져나온 연기우 등의 해산 군인들이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양주를 비롯한 경기 서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이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경기 지역에서는 양주·양근·강화·파주·장단·적성·연천·가평·포천·광주·교하·풍덕·이천·여주·양평 등이 의병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군대해산을 계기로 타오르기 시작한 경기 의병 운동은 1907년 12월 이인영(李麟榮)과 이은찬(李殷瓚)이 중심이 되어 서울 진공을 위한 ‘13도 연합 부대’가 결성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허위(許蔿)의 주력부대는 고재석·권중설(權重卨)·김규식(金奎植) 등의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12월 양주로 가서 이인영 부대에 합세하고자 하는 가운데, 대다수 경기 의병들도 연합부대에 참가하려고 양주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전술적 오류와 봉건 유생 중심의 계급성을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서울 진공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체포되면서 의병 전쟁의 양상은 변화하게 되었다. 고재석·권중설·김규식·왕회종(王會鍾)·연기우·황순일(黃淳一)·황재호(黃在浩)·김수민(金守民) 등 주력 일부가 임진강 유역과 경기 동북부 지역인 가평·적성·양주 등지에서 부대를 해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 투쟁을 벌여나갔다.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을 맡아 동대문 밖 전투에서 패배한 허위는 임진강 유역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일으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은찬 역시 1908년 3월 이래 양주와 포천 사이를 오가며 임진강 유역에서 의병부대 연합을 모색하였고, 6월 22일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포천읍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서 관동 창의원수부(關東倡義元帥府)가 결성되어 원수부 총대장은 허위와 김수민, 중군장 이은찬, 우군장 윤인순, 좌군장 정용대, 선봉장 이교성이 맡았다. 관동창의원수부는 총대장 이하 각대장과 부장들이 각기 독자적으로 항일 투쟁을 벌였고, 11월 중순 이후 점차 2~3부대씩 연합하여 일본군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기습작전을 벌이는 합진·분산의 유격전술을 구사하였다. 이와 같은 연합 의병부대의 공세적 투쟁은 1909년에 들어서면서 그 횟수를 늘리며 공세의 강도를 더하였다. 1월 4일 이은찬·윤인순 연합 부대로 보이는 200여 명의 의병이 포천 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습격하고, 포천·의정부 사이의 경비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이러한 연합작전은 지역주민의 지원 속에서 가능하였다. 이것은 이들 의병들이 전개한 투쟁, 즉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 그리고 경찰서 습격과 전선 절단, 일진회원 등 친일파 처단, 친일 부호와 면장·동장·이장을 상대로 하는 군량과 군자금 확보 투쟁, 방곡령 선포 등이 갖는 민족적 성격 때문이었다. 특히 일제는 의병의 군량과 군자금 확보 투쟁을 들어, ‘폭도’ 또는 ‘강도’로 매도하였다. 경기 의병은 당시 일제가 한국의 식민지적 재편성과 의병 ‘토벌’ 비용으로 거두어들이던 세금 탈취를 군자금 확보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 의병들은 세금을 정부에 납부하지 말고 직접 의병에게 교부할 것을 명령하여, 조세 탈취를 정당화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일제의 식민지화 획책을 저지하는 수단이었고 조세 수탈이 곧 일제 침략의 한 방편이라는 인식의 반영이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이은찬 부대는 1909년 2월 포천과 의정부 사이에서 집중적인 조세 탈취 투쟁을 하였다. 지역 인민의 절대적인 지원과 치밀한 정보 수집, 의병부대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 체계 등에 바탕한 연합과 분산의 유격전식 전술 구사로, 창의원수부에 속한 의병들은 임진강 유역과 경기 동북부 지역을 일시 ‘의병구’로 만들었다. 이에 일제는 3월에 들어 이곳을 대상으로 ‘대토벌’을 단행하였다. 일본군은 양주군을 중심으로 ‘토벌’에 나서 개성 관내와 적성·포천·삭령 지역으로 지역을 넓혀나갔다. 1908년 3월 이래 전술적 발전을 계기로 고양되기 시작한 경기 지역 의병 운동은 일본군의 계속되는 토벌로 인하여 원수부의 주요 의병장이 체포되거나 전사하면서 1909년 9월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기 지역 의병 운동이 쇠퇴하는 시점인 1909년 경기도 영평(현 포천시) 등지에서 약 15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활동하다가 4월 20일 영평군 동면 생래동(生來洞)의 금주산(金州山)에서 포천 주재 헌병대와 1시간 이상 교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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