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두
金善斗1896 ~ 미상
지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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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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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96년 평안남도 평양(平壤) 신양리(新陽里)에서 태어났다. 1902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였고 이어서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진학하여 1913년 졸업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5년 만인 191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대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목사가 된 뒤 첫 부임한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약 10년간 목회를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평양의 만세 시위는 세 곳에서 시작되어 가두에서 합류하는 양상을 보였다. 즉 당시 평양에서 제일 큰 교회였던 장로교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앞마당인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서는 장로교인들이, 광성학교(光成學校) 근처 감리교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뜰에서는 감리교인들이, 그리고 설암리(薛岩里) 근처 옛 대성학교(大成學校) 뒤편에 자리한 평양 천도대교구에서는 천도교인들이 각각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장로교 측에서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시각과 동일한 오후 1시에 집회를 시작하였다.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고종(高宗) 봉도식(奉悼式)을 치른다는 명목 하에 교인들이 숭덕학교 교정에 모였다.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봉도식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며 끝났다. 그러자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었다. 이어 독립선언식이 열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연설이 이어졌으며 애국가도 함께 불렀다. 이때 독립선언식의 사회를 맡았다. 숭덕학교 교사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경찰의 해산 요구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종로 큰 거리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남산현 감리교회에서도 장대현교회와 같은 시각에 같은 방식의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평양 천도대교구 집회는 서울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고 준비한 것이었다. 2월 하순에 평양에서 대교구장이 모여 모의하고 2월 28일 오후에는 천도교 선천교구장인 김상열(金商說)로부터 평양역에서 천도교중앙총부가 보낸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평양대교구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기독교에 약 7,500장을 보내고 남은 것은 산하 교구에 밀송하였다. 천도교인들 역시 3월 1일 고종 봉도식을 구실로 모여 집회를 한 후 가두시위에 나섰다. 세 방면에서 시가행진이 시작되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시위행렬은 점점 불어났다. 상인들은 철시하고 시위에 가담하였다. 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였다. 장대현교회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평양 천도대교구에서 집회를 마치고 나온 천도교인들과 합류하여 남문거리 평양경찰서 앞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향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고 경찰과 헌병들은 경찰서 건물을 앞뒤에서 막고 기마대를 내세워 시위대를 몰아냈다. 이때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진출한 시위행렬이 합류하면서 일본인 거리인 신시가지로 나아갔다. 여기서 다시 한 갈래는 도청과 재판소 앞 큰 거리를 누비며 평양역 광장까지 나아갔고 다른 한 갈래는 평양부청(平壤府廳) 옆과 일본인 중학교 옆을 거쳐 평양형무소 뒷거리와 서성리(西城里), 서문 밖 큰 거리를 돌았다. 저녁 7시 무렵에는 낮보다 배가 되는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이 소방대를 동원하여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시위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돌이 날아들어 경찰서 창문이 깨졌다. 이를 빌미로 경찰이 돌연 발포를 시작하고 군중을 체포하였다. 발포에 격분한 시위대가 이에 맞서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수백 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 다음 날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가 시작되어 3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1919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 산입) 형을 선고받자 항소하였다. 9월 19일 경성복심법원이 원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1년 2개월(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 산입)을 선고하자 상고하였으나, 10월 20일 고등법원이 기각하여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30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평양 신암교회(新巖敎會)로 옮겨 목회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부터는 평양신학교에서 성경 강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 선천(宣川)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성경 담당 교사로 부임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함가륜(咸嘉倫, Hoffman, C.)을 보좌하여 대리 시무를 하였다. 그 뒤 함경북도 성진(城津)의 성진교회에서 수년간 목회하였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차 총회를 앞두고 일본 기독교계의 협조를 얻어 탄압을 저지시키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궁내부 대신·국회의원·일본 육군대장 등을 찾아가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입장을 호소하였다. 일본의 기독교인들로부터 협조의 언약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체포되어 개성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경찰서에서 석방되자 곧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신학교(奉天神學校)에서 박형룡(朴亨龍)·박윤선(朴允善) 등과 같이 신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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