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金秉濬1876. 12. 21 ~ 1939. 12.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함남독판부
- · 조선농민사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5) 1876년 12월 21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용산리(龍山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 도호(道號)는 연암(蓮菴)이고, 호는 연사(蓮史)이며, 이명으로 김좌철(金座哲)을 사용하였다. 1907년 천도교에 입도하였고, 1919년 당시 이원군 천도교 교구장으로 활동하였다. 판결문에는 당시 직업이 명태상인(明太商人)으로 기재되어 있다. 함남은 1919년 2월 21일경 원산에서 먼저 독립 선언 발표 소식이 공유되며 독자적인 만세 시위 실행 준비가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2월 28일 독립선언서가 도착하고, 3월부터 76일간에 걸쳐 167회의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만세 시위는 원산뿐 아니라 함남 전체에서 3월 6일부터 중순까지 집중적으로 각 군·면별로 전개되었다. 이원군에서도 만세 시위의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특히 이원군의 3·1운동은 한반도 전체 만세 시위의 축소판과 같다. 시위를 준비하고 이끄는 조직·계획·지도자 등이 있었으며, 서울과 마찬가지로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작 및 대중의 호응이 높았던 지역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 경찰과 헌병의 무력 진압도 강했던 곳이다. 1919년 3월 이원군 천도교구장을 맡고 있을 당시 이도재(李道在)가 찾아와 만세 시위 계획을 알렸다. 이도재는 이원군 동면(東面) 의거리(儀德里) 사람으로 1919년 3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기독교 신자 박용해(朴龍海)에게 독립선언서 1매를 받고, 조직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자 찾아왔다. 3월 8일 천도교 교구실에서 이도재·공시우(孔時祐)·김중삼(金仲三)·염처학(廉處學)·박승린(朴承麟)·신만준(辛萬駿)·정주균(鄭柱均)·박석진(朴錫震)·최병원(崔秉元)·황봉계(黃鳳溪)·하홍대(河洪大)·박승룡(朴承龍) 등과 향후의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갖고 온 독립선언서를 원본으로 하여 ‘우리들 한국 민족은 세계 대세에 따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다’라는 내용의 문건을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이때 이도재에게 독립선언서 500매를 인쇄하게 하였다. 3월 9일 박승룡·공시우·이도재 등에게 다음 날인 3월 10일 읍내 시장에서의 만세 시위를 위해 부근 마을에 연락하게 하였다. 3월 10일 아침 700여 명의 군중이 서면에 위치한 이원 읍내시장으로 몰려 나왔다. 이도재와 함께 군중의 앞장에 서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일본 경찰이 현장으로 와서 시위대를 체포하며 해산시켰다. 이때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지만 8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자신의 행위는 한국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했으므로 범죄가 아니다’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에 설치한 연통부의 함남 이원 참사(參事) 및 함남독판부(咸南督辦府) 참사원(參事員)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는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중앙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천도교 이원교구의 교구장과 진성포(眞誠布)와 지원포(知源布) 주간포덕사, 주간도정, 강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중앙종리원의 종법사, 포덕과 종리사, 경도관정(敬道觀正), 천도교청년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다 1939년 12월 2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임광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